국민연금·소액주주 조양호 퇴진시켜… ‘오너 리스크’ 더이상 용납되지 않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대표이사에서 물러나게 됐다. 어제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이 부결됐다. 조 회장은 아버지로부터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물려받은 지 20년 만에 경영권을 상실했다. 조 회장의 경영권 박탈은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지고 소액주주 등도 동참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지난해 7월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 원칙인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에 따라 적극적으로 주주권 행사를 하기로 한 뒤 대기업 총수가 경영권을 제한받은 첫 사례다. 국민연금이 이날 SK㈜ 주총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을 반대했지만, 무산된 것과 대비된다.조 회장의 퇴진을 두고 국내 자본시장 안팎에서는 ‘자본시장의 촛불혁명’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시장 자본주의 원리에 비춰 보면 ‘비정상의 정상화’에 가깝다. 주식회사의 존재 목적은 주주로부터 위탁받은 자본을 토대로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고, 이를 주주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총수 경영자가 각종 불법행위를 저질러 기업가치를 훼손해도 주주에게 책임지는 경우가 없었다.
이번 경영진 교체는 총수가 기업을 좌지우지하고 주주들은 ‘오너 리스크’를 감수해야 했던 관행에 제동이 걸리게 됐다는 의미가 크다. 조 회장과 그 일가는 ‘땅콩회항’과 ‘물컵갑질’ 등으로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대한항공의 주가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조 회장은 회사에 274억원의 손실을 끼쳐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돼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대한항공에 투자한 국민연금 자금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점도 긍정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조 회장의 이사 연임안 부결에 대해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의 긍정적인 면을 잘 보여 줬다”고 평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재계는 정부가 ‘대기업 길들이기’에 나설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국민연금이 국내 주요 대기업의 대주주이기 때문이다. 재계가 비판 성명을 내고, 국민연금 내부에서 반대 의결권 행사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인 배경이다. 국민연금은 이런 우려를 불식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압력을 배제하고 수익률 제고에 한정해 주주권을 행사하는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또 조직과 인적 구성의 독립성도 뒤따라야 한다. 주주권 행사를 결정하는 기금운용위원회의 상설화·독립화가 필요하다. 이번 첫 퇴출을 계기로 대기업 오너들은 ‘회사 가치를 훼손하면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경영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주주의 이익을 침해한다면 오너라도 경영권을 내놔야 하는 시대다.
2019-03-28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