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그 여자는 거기 없었다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그 여자는 거기 없었다

입력 2020-06-02 17:34
수정 2020-06-03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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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하머스호이, ‘스트란드가드의 실내, 마루에 비치는 햇빛’, 1901년 (46.5×52㎝, 덴마크 국립미술관, 덴마크 코펜하겐)
빌헬름 하머스호이, ‘스트란드가드의 실내, 마루에 비치는 햇빛’, 1901년
(46.5×52㎝, 덴마크 국립미술관, 덴마크 코펜하겐)
하머스호이는 코펜하겐 스트란드가드 30번지에 십 년 동안 살면서 이 집을 일흔 점 가까이 그렸다. 이 방은 작은 살롱이다. 가운데 창문이 있고 오른쪽에는 흰 문이 있다. 왼쪽 벽에는 액자 두 개가 걸려 있고 그 앞에는 타원형 탁자가 놓여 있다. 탁자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화가의 부인 이다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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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 미술평론가
이미혜 미술평론가
관객은 이 그림을 보면서 어디에다 중점을 두어야 할지 주저하게 된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성은 주인공이 되기에는 존재감이 빈약하다. 한쪽에 치우친 데다가 뒷모습이어서 무엇을 하는지,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다.

인물보다는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더 중요해 보인다. 햇빛은 흰 커튼을 더욱 희게 만들고, 창턱과 바닥에 창살 무늬를 떨구고 있다. 지금은 아침나절일까 늦은 오후일까. 이 고요한 방안에서는 시간조차 정지된 것 같다.

하머스호이는 서구 예술이 급격한 변화를 겪던 세기 전환기에 활동했다. 야수파, 표현주의가 등장하면서 원색이 폭발했으나 하머스호이는 흰색, 회색, 검정, 갈색으로 이루어진 모노톤에 가까운 그림을 고집했다. 색뿐만 아니라 지시적 내용도 소거했다. 가정은 전통적으로 여성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화가들은 실내 그림에 여성을 등장시켜 온기를 불어넣거나 모종의 드라마를 암시했다. 하머스호이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다는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 부부의 실제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머스호이는 대학 친구이자 동료 화가인 페테르 일스트의 여동생 이다와 평생을 해로했다. 자식은 없었지만, 사이가 나빴다는 증거도 없다. 과묵했던 화가는 가까운 사람들한테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번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코펜하겐으로 하머스호이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하지만 화가가 아무런 얘깃거리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릴케는 그에 대한 글을 쓰려던 계획을 접어야 했다. 그를 인터뷰했던 기자는 화가의 집이 그의 그림과 똑같았다고 증언한다.

창백한 공간 속에 이다는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고독의 메타포를 창조했지만, 모델이 돼 준 아내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힌트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도리어 그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미술평론가
2020-06-0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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