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의 아침] 컷오프 인생/김경운 정책뉴스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컷오프 인생/김경운 정책뉴스부 전문기자

김경운 기자
입력 2016-04-20 18:06
수정 2016-04-2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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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운 정책뉴스부 전문기자
김경운 정책뉴스부 전문기자
지난 4·13 총선은 유례없는 공천(公薦) 파동을 겪었다. 선거 기간에 유세 대결을 펼치기도 전에 유력 정당의 천거를 받는냐, 마느냐에 따라 미리 당락이 점쳐지는 기이한 현상과 이를 둘러싼 진흙탕 싸움이 유권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공천이 어찌 보면 컷오프다.

컷오프는 본 진행에 앞서 불필요한 선발 절차를 간소화하는 일종의 예선 과정이다. 절차적 합리성 덕분에 컷오프라는 용어는 공학, 패션, 체육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쓰인다. 그러나 이번 총선의 컷오프 과정은 그 불투명성 때문에 시퍼런 오점을 남겼다. 공천 탈락을 납득할 수 없는 후보들이 반발했고, 결국 유권자들은 무소속 당선자를 선택하고 말았다. 골프나 월드컵 축구대회의 컷오프 과정인 예선은 본선처럼 경기 규칙에 따라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아무도 결과에 불만이 없다.

컷오프가 자칫 경쟁의 기회조차 빼앗는 과정이 돼선 안 된다. 우리 사회에서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려면 이제 수천만원의 비용을 들여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거쳐야 한다. 시골에서 어렵게 사는 부모의 가난을 대물림하기 싫어서 개천의 용이 될 기회를 향해 고시에 매진하던 시대는 끝난 셈이다. 물론 고시 제도의 문제점은 상존하고 있다. 하지만 소외받은 그들에게 인생 역전의 사다리조차 빼앗는 것이 과연 옳을까. 다양한 루트의 인재 천거 제도를 병행하는 게 그렇게 불가능했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정부는 대학 입학 수험생의 학습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영어의 자격시험화를 추진하고 있다. 영어는 조기 유학 등으로 이미 상당수 학생이 능력을 갖춘 만큼 수험 과목에서 제외하고, 자격만을 검증하는 과목으로 격하시킨다는 뜻이다. 일부 대기업도 입사 시험 때 토익 점수를 제출하지 않도록 한다고 한다. 학부모 중에선 재빨리 자녀의 영어 공부를 포기시키는 현상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기업들은 모든 인터뷰 과정을 아예 영어로 진행한다. 대입에서도 영어가 약하면 아예 시험을 볼 자격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학습 부담을 줄여 준 것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영어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는 말이 된다. 영어 실력은 뒤떨어져도 수학이나 과학을 더 잘해서 총점에선 합격선을 넘었던 학생은 역전의 기회를 잃었다.

컷오프 경쟁은 인정한다. 다만 그 과정도 합리적 평가의 범주에 들어야 한다고 본다. 1980년 이전의 대입 제도는 예비고사를 거쳐야 본고사의 자격이 주어졌다. 예비고사는 일종의 자격시험이기도 했지만, 그 점수가 나중에 본고사 점수와 합산돼 전형의 근거로 쓰였다. 예비고사와 같은 컷오프 과정에서 수험생의 숨은 노력도 적으나마 인정한 것이다.

우리 주변은 눈에 띄는 결과만 중시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하지만 취업난의 컷오프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적어도 ‘실패할 수 있는 기회’라도 줘야 한다. 한두 번쯤 실패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는 그들이기에 부모 세대는 기꺼이 세금을 내서 그들의 실패를 감싸야 한다. 실패가 훗날 더욱 단단한 성공의 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kkwoon@seoul.co.kr
2016-04-2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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