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영 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영화 ‘1917’은 1917년 4월 6일 하루 동안의 전투를 다룬다. 사병 스코필드와 블레이크가 겪는 경험의 생동감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uous shot) 기법을 많이 주목한다. ‘나누어 찍은 장면들을 이어 붙여 하나의 장면으로 보이게 하는 기법’(‘씨네21’)이다. 인물들의 행보를 좇는 카메라의 운동은 관객에게 전투를 직접 체험한 것처럼 감각적 쾌감을 준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그 감각적 실감은 두 사병이 참전해 죽거나 살아남는 참혹한 당일의 전투 혹은 더 나아가 1차 세계대전의 진실을 얼마나 오롯이 전달하는가? 개인의 체험은 얼마나 사태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가?
이런 말들을 듣곤 한다. “나는 전쟁에 참여했다. 그래서 전쟁의 진실을 잘 안다.” 더 쉽게 말하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다. 언뜻 수긍할 만한 주장이지만 착각이다. 직접적 경험이 사태의 진실을 가리는 경우도 많다. ‘1917’처럼 전쟁터에서 바로 옆에서 죽어 가는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면 아마 대부분의 군인은 격한 슬픔과 분노, 적에 대한 적개심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당연한 반응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정념(passion)에 쉽게 사로잡힌다.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다. 오히려 정념에 사로잡힌 존재다. 그리고 그런 분노, 슬픔, 적개심 때문에 사태의 진실을 종종 보지 못하게 된다. 인간이 지닌 감각의 한계다. 전쟁이든 무엇이든 어떤 사태의 진실에 도달하려면 휘몰아치는 정념의 혼란스러운 계곡을 통과해 냉철한 인식의 지평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자적으로 생생한 주관적 경험을 했다고 해서 꼭 사태의 진실을 보게 되지는 않는다. 경험은 진실에 이르는 주요한 통로이지만 둘은 같지 않다.
당사자주의라는 말이 있다. 당사자는 어떤 일을 직접 몸으로 겪은 존재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 일을 직접 경험했으므로 당사자는 누구보다 사태의 진실을 잘 알 것이다.’ 절반만 적중한 말이다. 물론 당사자가 겪은 경험의 가치를 십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면도 유념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청년 맑스’는 그 지점이 무엇인지를 포착한다. 두 혁명가 바이틀링과 마르크스 사이의 논쟁이 인상적이다. 바이틀링은 현장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난 편지를 수천 통 받았어요. 민중의 고통과 유리된 탁상공론보다 내 겸손한 노력이 대의에 훨씬 이바지함을 입증한 편지를요.” 마르크스가 분노하면서 대꾸한다.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바이틀링은 노동자 출신의 혁명가였다. 당대에 이미 혁명운동에서 자리를 확고히 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노동계급 출신이 아닌 마르크스가 어쩌면 우습게 보였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떤 출신을 따지면서 그 출신만이 발언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걸 출신주의(nativism)라고 한다. 예컨대 흑인 등 차별받는 유색인종만이 인종주의를, 무산자(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계급 문제를, 성적 소수자만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문제를 언급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태도. 지금, 이곳에서도 종종 확인하는 모습이다.
직접 경험이 주는 생생한 감각의 힘이 있다. 하지만 그게 관건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그 점을 날카롭게 타격한다. 출신이 무엇이든 당면 문제를 풀려고 할 때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무지와 만용은 그렇게 통한다. 자신이 속한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생활 경험은 소중하다. 하지만 때로는 그 경험에 수반되는 정념의 강한 힘 때문에 진실을 호도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물며 사안의 당사자를 대변하는 이들이 진실을 선험적으로 파악한 듯이 확언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누구도 사안의 진실을 선험적으로 알 수는 없다. 진실은 자임하는 것이 아니라 입증돼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조차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리어왕’)라고 물어야 하는 곤혹스러운 존재다. 감각과 인식에서 구멍이 많은 존재다. 그런 불완전한 존재들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려는, 어쩌면 불가능한 노력만이 가능하다. 그 지점이 내가 생각하는 윤리의 출발점이다.
2020-07-3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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