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마냥 허리 오그리고
뉘엿뉘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넘어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굽이굽이 등 굽은
근심의 언덕 너머
골골이 뻗치는 시름의 잔주름뿐
저승에 갈 노자도 나는 없느니.
소태깥이 쓴 가문 날들을
여뀌풀 밑 대어 오던
내 사랑의 봇도랑물
인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 두고,
으스스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메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엇비슥이 비끼어 누워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
황혼이 많다. 저 해남쯤이던가? 천지에 가득한 그 속으로 빠르게 달려 본 적 있다. 처음에는 참으로 황홀하다가도 다 스러진 어둔 시간 속에 닿으면 한없는 쓸쓸함이 온다. 더구나 내 삶이 이제 여기에 닿았구나 생각하면 돌아보고 싶지 않은, 살아온 내력까지 보게 된다. ‘저승에 갈 노자도’ 없는 삶이었다니.
하루를 다 살고 황혼을 맞는다. 밤이 오고 잠을 청한다. 또 하루가 고단했건만 잠으로 건너가기는 달콤하지만은 않다. 딸네 집에 가는 심정이라니. 내키지는 않으나 가긴 가야 하는 사정이 있어 그리로 간다. 가문 자리의 ‘여뀌풀 밑 대어 오던 봇도랑물’의 사랑마저 제대로 해보지 못한 청춘의 일까지도 이제야 맘껏 흐르라고 ‘내버려 둔’들 무슨 소용인가.
‘산 그리메’ 아래 눕는다. 산 아래 허드레 무덤 자리다. 그 자리에 ‘엇비슥이 비끼어’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남은 생은 어떠해야 하느냐…. 물었을 것이다. 그렇게 ‘황혼’은 커다란 인생론의 문장으로 펼쳐져 있다.
장석남 시인
2022-10-07 26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