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감꽃은 누이를 닮았다/정훈교
돼지 머릴 삶는 가마솥 위로 어둑어둑 당신이 온다
목소리는 낡은 옛집이 물에 잠기듯 어둑어둑하고
푹 고은 살과 뼈는 무릎처럼 허물어져 어둑어둑 잠기고
팔팔 끓는 이마를 짚어보다가도 이내 또 어둑어둑해지는
쇠죽을 쑤는 무쇠솥과 붉은 아궁이를 안으며 어둑어둑 당신이 온다
감나무에서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별 하나 지상으로 떨어진다
밤새 푹푹 잠기던 길은 마을 하나를 재우고서야 아득해지는
이 별에서 이별을 생각하는 당신이 더욱 아득해지는
아침 아궁이에 밀어 넣은 감자 하나가 어둑어둑 굴러 나온다
오늘따라 아랫목도 덩달아 어둑어둑해지는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군불을 더 넣으신다)
어릴 적 내 살던 마을에서는 감꽃을 감또개라고 불렀지요. 감또개가 피는 철엔 감나무 아래 모여 하루 내내 놀았습니다. 감또개는 촉촉하고 단맛이 있지요. 꽃잎 살이 통통해 식감이 좋았습니다. 한 줌 두 줌 따먹다 보면 횟배가 가라앉았지요. 감또개를 엮어 꽃목걸이를 만들기도 하고 꽃반지를 만들기도 했지요. 누군가에게 꽃반지를 끼워 주기도 했는데 그때부터 내 시가 세상에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감꽃이 피는 계절이 다가옵니다. 묵은 감나무에 올라 감꽃 속에 앉아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찾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아궁이에 밀어 넣은 감자 한 알이 ‘어둑어둑’ 굴러나오는 시간입니다.
2022-04-29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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