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뒷좌석에 앉아서 손톱을 깎는다
손톱을 잘라 낼 때는
조금 착해지는 것 같다
고개를 수그린 채
무릎 위 티슈 한 장에 모인 그것들을 들여다본다
주먹을 움켜쥔 아이의 손아귀를 펼치며
앞니로 첫아이의 무른 손톱을 끊어 주던
눈록嫩綠의 순간이 반짝, 돋아난다
좌석 밑으로 떨어진 몇 조각은 미처 하지 못한 말이며 차창 밖 흩날리는 토로스산맥의 눈발처럼 종일 나를 관통해 간 열 개의 감정이다
(더는 할 말이 없는 손톱들)
아직 속의 분홍을 다 비워 내지 못했다
그해 여름은 쪘다. 밀짚모자가 있었으나 쓰지 않고 걸었다. 바다는 푸르고 싱그러웠다. 검붉은 얼굴로 사람들이 환하게 웃었다. 니코스카잔차키스 전태일 이라클레온 대구 광주…. 단어들에는 단어들만의 꿈이 있다. 떠돌이 개가 다가와 바짓가랑이 냄새를 맡았다. 그에게 비스킷 몇 조각을 주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 건너 산들의 모습을 보았다. 토로스산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떠돌이 개가 곁에 앉는다. 내가 손톱 깎는 모습을 유심히 본다. 헤이, 랄루! 발톱 깎아 줄까? 랄루는 내가 아는 가장 사랑스런 이름이다. 미친 놈. 그와 나는 동일한 꿈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삶 속에는 행운이라 불릴 만한 순간이 있다. 손톱을 깎고 다시 지중해의 햇살 속으로 들어섰다.
곽재구 시인
2021-08-0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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