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눈 나린 길/박남수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눈 나린 길/박남수

입력 2020-12-24 16:36
수정 2020-12-25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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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나린 길/박남수

겨울 밤, 눈 나리는 밤
하아얀 눈을 밟으며 밟으며 가신 이가 누구일까

머얼리 발자최 조고만 발자최 건넌 마을로 건너갔고나

한 줄기 입김에도 흐려지는 유리창 앞에
호올로 호올로 금붕어처럼 직히며
흰 눈 나려, 나려서 쌓이는
이 아츰 우편배달부가 지날 상한 아츰

행여 돌아올 리 없을 이
그이를 그리 그리며
내 마음은 자릿자릿 설였다

태고 적 서름이 서린 이 아츰에
알지도 보지도 못한 이 가신 길에

어찌하여 조고만 발자최에 슬픈 전설을 맺으려는 걸까

눈 오는 날은 옛 생각이 납니다. 1989년 겨울,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 마을에서 하룻밤 잤습니다. 여관은 난방이 없었습니다.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침낭과 이불 속에서 이를 덜덜 떨었지요. ‘잉크병 얼어붙는 밤’, 김기림의 시 구절 절로 생각났지요.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창틀을 덮었습니다. ‘눈 나린 길’은 1940년 출간된 시집 ‘초롱불’에 실린 작품입니다. 어릴 적엔 초롱불을 켜고 저녁을 먹었지요. 식구들의 얼굴 그림자가 황토벽에 어룽거렸습니다. 80년 전의 우리말 읽는 느낌 어떤지요? 지금보다 다정하지 않은지요? 눈 쌓인 들판 너머 우리가 그리워한 세상 있을 것만 같습니다.

곽재구 시인
2020-12-2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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