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내 살았던 도시 환란을 겪은 뒤
서남해안 어느 산골 암자에 스며들어
가부좌 틀고 중님 흉내 냈지
그 암자에 방부 들인 진짜 중님
절 아래 마을 식당에서
엎어말아국수 주문했단다
위에는 국수 아래는 고기!
엎어말아국수가 서양에도 있었으니
이탈리아 수도승이 머리를 감추기 위해 쓴 모자 이름이
카푸치노였다네
나중에 그게 커피를 덮은 우유 이름이 되었다 하니
역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바람 속 가을 냄새 깊어진다. 델리의 파하르간지, 작은 빵집 생각이 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훅 끼치는 계피 냄새. 계피 향 속에 여행자들이 모여 여행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좋았다. 시나몬 빵과 계피 가루를 얹은 카푸치노를 천천히 음미하고 있으면 ‘철학적인 지옥’이라 불리는 인도의 풍경들이 사랑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엎어말아국수. 이름 속에 독한 리얼리즘이 들어 있다. 엎을 것인가 말 것인가. 먹물 옷의 수도자는 번민한다. 국수 아래 고기가 들어 있다. 바람에 노란 은행잎이 날린다. 파하르간지 빵집의 계피 향이 바람 속에 스며 있다. 지나간 시간, 사랑할 만하지 않았는가. 엎어도 은행잎은 날리며, 엎지 않아도 카푸치노 향은 가을을 적실 것이니.
곽재구 시인
2020-11-1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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