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해방주의자
신여성 나혜석은
용산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샀다
기차는 40㎞의 속도로 평양을 지나
신의주
압록강 건너
옛 부여의 수도 창춘
시베리아 평원을 거쳐 페테르부르크
베를린 그리고, 파리
파리에서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였다
용산역 매표 창구에서
‘파리’라고 말하는 그녀의
입 모양을 상상하면서 나도 입술을 붙였다 벌리며
툭 뱉어 본다
‘파리’
오늘
이 외로운 섬나라 조국에서
끊어진 철길 앞에서
마음속 큰 고동소리를 들으며
나혜석을 그려 본다
용산역 매표 창구에서
파리행 열차표를 받아들고 떠나는
자유로운 영혼
그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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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역에 인터넷 예약 부스가 하나 있다. 시베리아횡단철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열차표 예약 부스다. 부산이나 목포를 출발하여 함경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횡단열차. 가슴 설레지 아니한가. 가을이 깊어지면 시베리아 일대에는 자작나무의 단풍 축제가 펼쳐진다. 러시아 작가들이 자작나무를 사랑한 이유와 조선의 시인들이 매화를 사랑한 이유에는 닮은 점이 있다. 등피가 쩍쩍 갈라진 모습. 귀족과 사대부 관리들에게 착취당하는 민초들의 모습. 자작나무의 신비한 하얀 빛과 매화꽃의 사랑스런 향기는 억압을 뚫고 천리를 간다.
곽재구 시인
2018-10-0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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