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미산/박후기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미산/박후기

입력 2016-09-09 22:50
수정 2016-09-10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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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박후기

지도 깊숙한 곳,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미산이 있다

그곳은 강원도의 내면(內面),

미월(未月)*의 사람들이

검은 쌀로 밥을 짓고

물살에 떠내려가는 달빛이

서어나무 소매를 적시는 곳

나는 갈 곳 몰라

불 꺼진 민박에 방을 얻고,

젊은 주인 내외는

버릇없는 개를 타이르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멍든 개가 물고 간

신발을 찾아

어둠 속을 뒤지는 밤,

미산에서는

좁은 개집에서도

으르렁거리며

푸른 별이 빛난다

*음력 유월

시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미산’이 있다. 현실에서 그곳은 내린천의 맑은 물이 흐르는 강원도 인제 어디쯤에 있는 것이지만 꼭 그곳이 아니더라도 무방하다. 이때의 미산은 일상에서 흩어져 있던 나를 아무렇게나 주워 담아 떠나는 마음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미산이라면, 나도 미산에 가 본 적이 있다. 미산은 여수에도 있고 군산에도 있고 고성에도 있으며 멀리 서귀포에도 있었다. 미산은 머문다는 것보다 떠나왔다는 것에 방점이 찍히는 곳이다. 그래서 미산은 거처가 되지 못하는 방랑지다.

이때의 방랑은 ‘장소’보다는 ‘관계’에 가깝다. 특히 마음은 사람이 갖고 있는 그 어느 것보다도 쉽게 피로해지는 탓에 매번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지쳐 돌아오기 일쑤다. 그래서일까. 나는 미산에 도착하면 처음 며칠은 숙소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렇게 며칠 동안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면벽수행 같은 것을 하다 보면 그제야 내가 떠나온 거처가 그리워지고 조금 부담스러웠던 인연들이 다시 그리워짐을 경험한다.

가을이 더 깊어지면 어느 바닷가 마을에 있는 또 다른 미산에 가 볼 생각이다. 작은 등대가 하얗게 밤을 새우고 있다는 그곳. 운이 좋다면 그곳에서 “좁은 개집에서도 으르렁거리며 푸른 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준 시인
2016-09-1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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