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의 헌법 너머] 힘을 좇는 사회와 권력국가의 그림자

[이종수의 헌법 너머] 힘을 좇는 사회와 권력국가의 그림자

입력 2019-04-21 20:48
수정 2019-04-22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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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구에서 근대 헌법에 부여된 주된 과업의 하나가 시민의 생명·자유 보장과 함께 무소불위의 국가권력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로크와 몽테스키외가 권력분립론을 주창했었다. 징계 또는 화해를 위해 개인이나 마을 단위의 지역공동체들이 행사해 왔던 사적 권력들은 일찍이 국가가 중앙집권체제를 갖추면서 해체됐다. ‘자구행위’(自救行爲)나 ‘자력구제’(自力救濟)의 금지가 그렇다. 즉 법이 허용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설령 강도에게 자기 물건을 빼앗기거나 자신의 가족이 몹쓸 변을 겪는 등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개인은 자기 물건을 스스로 되찾거나 응징하지 못하고 일단은 국가에 이 일을 맡겨야 한다. 이로써 ‘권력독점체’로서의 국가가 성립됐다고 말한다.

권력을 없애도 잠시 사라진 그 공백에 무질서와 함께 어느새 새로운 권력이 들어서는 게 인지상정이자 경험칙이었다. 그래서 근대 헌법은 국가권력 자체를 긍정하면서 그것을 쪼개어서 각각의 권한 내지 권능으로 순치시켰다. 그리고 그것이 남용 또는 악용되지 않게끔 나름의 권력 통제 메커니즘을 갖추었다. 그러나 지난 정권에서 조직적으로 은폐됐다가 최근에 공소시효를 다투면서 재조명되는 여러 권력형 비리 사건과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경찰과 국군기무사의 전방위적인 사찰이 있었다는 기사를 접하고서 과연 법치국가가 맞는지 깊은 회의감이 든다.

‘법의 지배’로 일컬어지는 법치주의 내지 법치국가에 대응하는 개념이 바로 ‘권력국가’다. 이는 권력이 법에 기속되지 않은 채로 전횡하는 국가를 뜻한다. 그런데 권력적 관계가 단지 공적 영역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타인의 의지를 꺾는 힘’으로 권력의 본질을 정의하자면 경제권력, 언론권력, 문화권력 등이 그렇듯이 사회 안에도 여러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국가권력에는 앞서 밝혔듯이 헌법과 관련 법령들을 통해 나름 법적인 그리고 제도화된 통제 장치를 갖추고 있지만, 이들 사회 내 권력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수년 전부터 크게 논란이 돼 온 여러 ‘갑(甲)질’이 드러내듯이 이처럼 사회적 권력들의 횡포 또한 심각한 문제로 불거져 있다. 그것이 해당 영역에서 합리적으로 통용되는 윤리와 관계의 미덕만으로 해결되지 못한다면 언론민주화, 경제민주화, 학원민주화의 요청이 그렇듯 외부로부터의 통제와 규율이 필요하다.

법치국가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은 유감스럽게도 권력국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소 과장하자면 마치 힘의 신화와 주술을 숭배하는 고대의 부족사회와도 같다. 즉 “능력(실력)에 따른 차별은 합리적이고 정당하다”는 변종의 소위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 대부분 영역에서 압도하고 있다. 이는 일각에서 제기돼 온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비판과도 일맥상통한다. 언어가 마음의 거울이라 하듯이 요즘 통용되는 우리 사회의 언어 관행이 특히 문제다. 언론은 늘 국가 경쟁력, 기업 경쟁력 및 대학 경쟁력을 앞세워 다그친다. 축구 경기의 중계방송을 듣고 있자면 체력과 정신력은 물론이고 슈팅력, 패싱력, 순발력, 골결정력과 조직력 등 온갖 힘들이 난무한다. 그리고 공부 잘하는 똑똑한 사람이 되려면 암기력, 독해력, 어휘력, 추리력 등과 같은 많은 힘들이 필요하단다. 어디 그뿐인가. 또한 직장에서 인정받으려면 앞서 언급한 힘들에 더해 창의력, 판단력, 결단력, 문제해결 능력, 소통 능력 등이 요구된다. 게다가 요즘 대학에서도 훌륭한 교수가 되려면 강의력과 연구력뿐만 아니라 외부 연구비 수주력까지 갖추어야 한다.

이렇듯 사회에 있기 마련인 여러 다양한 차이를 고정된 언어로 포착한 결과가 접미사처럼 흔히 붙는 ‘력’(力)이다. 방송에서 그리고 우리네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력’을 붙여서 대화하고 있는지를 한번 반추해 보자. 이제는 아무 단어에다 ‘력’(힘) 자를 마구 갖다 붙여도 그다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로써 약간의 차이가 부당한 차별로 바뀌어도 차별적 취급에 대해 객관성과 공정성의 외관을 갖추게끔 만든다.

평등을 주제로 다루었던 오래전 글에서 필자는 “이제 곧 당연한 외모의 차이가 ‘외모력 부족’으로 회자될” 것이라고 언급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같은 진단이 크게 틀리지 않은 작금의 현실에 몹시 씁쓸하기만 하다. 이렇듯 일상에서 온갖 힘들이 횡행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 권력국가의 망령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2019-04-2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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