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입헌주의와 더불어 헌법국가는 어느새 지구상에서 보편적이고 압도적인 현상이 됐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이 헌법국가가 그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프랑스대혁명이 그랬듯 권력과 기득권 그리고 완고한 편견에 맞서서 새로이 주권자로 등장한 시민들이 흘린 피와 무수한 죽음을 통해 쟁취한 결과물이다. 권력의 헤게모니 변동뿐만 아니라 체제 자체의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왔기에 ‘시민혁명’으로 불린다.
그런데 이후에 진정한 시민혁명이 없이 그저 주어진 헌법국가를 마주했던 많은 나라들이 비슷한 고민에 처했다. 대표적으로 독일이 그러했다. 시민혁명을 거쳐 온 프랑스처럼 ‘국민주권’이 아니라 바뀐 상황 속에서 ‘국가주권’ 또는 ‘법주권’으로 궁색하게 나름의 법리를 새로이 모색하다가 끝내 국가주의로 경도돼서는 양차 세계대전을 호되게 겪고서야 뼈저린 반성과 성찰 속에서 비로소 자유롭고 민주적인 헌법국가에 안착했다.
우리도 이와 다르지가 않다. 일제의 강점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분단의 상흔과 함께 주어진 헌법국가였다. 이렇듯 시민혁명의 전통이 부재하고 과거 청산이 미흡했던 가운데 친일파 등의 기득권 세력이 온존했고, 분단과 한국전쟁에 뒤따르는 이념적 갈등 등으로 숱한 질곡(桎梏)의 시간을 거쳐 왔다. 전통의 부재에 뒤따르는 허전함 탓이겠으나, 일각에서는 그간 벌어진 여러 사건들에다 ‘혁명’을 수식어로 갖다 붙이곤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혁명이 아니라 불의(不義)한 권력자를 내쫓거나 헌법전의 일부를 바꾼 ‘의거’ 내지 ‘봉기’이다. 이처럼 3·1독립운동, 4·19민주의거,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그리고 국정농단에 분노해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최근의 촛불봉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의 여러 저항적 봉기들이 헌법국가로의 경로를 어렵사리 이끌어 왔다. 그리고 이렇듯 중첩된 여러 사건들과 함께 사실상 ‘시민혁명’에 필적하는 나름의 사회적 성찰과 시민사회의 역량이 축적됐다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아직은 아닌 모양이다.
최근 자유한국당의 전당대회에 즈음해 5·18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망언과 빨갱이 등의 색깔론이 여전히 난무하고 있다. 몹시 유감이고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최근의 남북한 및 북미 관계 개선과 재집권에의 초조함 등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그 이면에는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국가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국가의 존립 그 자체가 맹목적인 절대선인 셈이다. 국가대항전인 올림픽과 월드컵 축구대회가 그렇듯이 모든 나라에서 어느 정도의 국가주의는 존재하고, 공동체의 통합 차원에서 때로는 긍정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타자에 대한 배타와 차별로 이어질 때는 악이 된다.
이러한 까닭에 위르겐 하버마스는 애국심이 아니라 애헌심(愛憲心)을 옹호한다. 민주헌법국가에서 국가는 더이상 그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지켜내야 할 지고지선의 대상이 아니다. 헌법국가의 존재 의의와 목적은 무엇보다도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는 데 있다. 그간 겪어 온 역사적 질곡 끝에 한층 성숙해진 시민사회의 자정(自淨) 역량을 기대할 따름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두려워야 망언도 색깔론도 비로소 그친다.
2019-02-2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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