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우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철도원 삼대’를 탐독하면서 소설이 당대의 중대한 의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지나온 역사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 주요한 수단임을 다시금 절감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제가 단지 계몽적 차원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작품 속의 “결국 조직이란 모든 약하고 외로운 개인들의 집합체였다”는 표현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시선을 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철도원 삼대’는 이백만-이일철·이이철 형제-이지산-이진오로 이어지는 사대에 이르는 가족사의 애환을 다룬다. 그 과정에서 철도의 근대적 이식 과정, 철도원과 그 가족의 일상, 경성 콤그룹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 그에 이어진 해방 직후 영등포 지역의 노동운동, 독서회 조직, 밀정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진행된다.
이 땅의 근현대, 그 무수한 학살과 죽음, 탄압과 고문의 역사는 여전히 형상화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음을 ‘철도원 삼대’는 여실히 보여 준다. 그 상처와 비극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스토리텔러의 집요한 정념과 의지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꾸준한 역사 공부, 현대사를 통과한 다양한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신선한 주제의 소설을 낳는 계기임을 환기한다. 가령 철도원을 주요 인물로 배치한 이야기 구성도 흥미롭거니와 밀정을 둘러싼 스토리는 역사와 연계된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민감한 소재가 아닐까 싶다. 식민지 시절 내내 묵묵히 철도원 업무에만 전념하던 일철이 해방 후 영등포 철도노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역사의 한복판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작년 가을에는 KBS에 의해 밀정 혐의자 900여명의 명단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가의 다양한 마음만큼이나 갖가지 사연과 행적을 담은 수많은 밀정 스토리도 가능하겠다. 단지 밀정을 단죄하는 구도에서 더 나아가, 그들의 내면과 음산한 욕망까지도 치밀하게 형상화하는 서사가 필요하다. 역사 연구의 진전만큼 문학도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철도원 삼대’에서 다뤄진 밀정과 친일 경찰에 대한 묘사는 작가 황석영이 이 땅의 현대사에 던지는 뼈아픈 질문과 진단의 소산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한 ‘철도원 삼대’에는 작가 사인이 인쇄돼 있다.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한 줌 먼지에 지나지 않지만 세상은 조금씩 나아질 것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노동운동가 진오는 “증조할아버지 이백만에서 할아버지 이일철과 아버지 이지산을 통해 그에게 전해진 의미는 무엇이었을까”라고 되묻는다. 소설에는 “그것은 아마도 삶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지속된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낸다”고 적혀 있다.
이즈음 우리 사회는 그동안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주제들, 가령 진보적 운동단체의 성과와 한계, 밀정을 비롯한 일제강점기의 그늘, 일본과의 관계 설정 등의 민감한 논점을 마주하고 있다. 무엇보다 작가와 작품의 전언대로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 앞으로 계속될 삶을 위해 지식사회가 이런 의제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논의해야 한다. ‘철도원 삼대’는 그런 부탁을 하는 작가의 절박한 마음이 담긴 소설이자 역사와 정치를 품은 문학의 고유한 힘을 느끼게 만든 문제작이다. 모처럼 마음의 근육을 긴장하게 만든 독서였다.
2020-06-0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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