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유학자 세조를 아시나요/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금요칼럼] 유학자 세조를 아시나요/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입력 2021-09-09 20:32
수정 2021-09-10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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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세조는 탁월한 유학자였다. “무사들은 훈련이 웬만큼 잘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문신의 강습에도 힘써야겠다.”(실록, 세조 5년 6월 12일) 국방력이 튼튼해지자 세조는 젊고 총명한 문신들을 불러 ‘중용’을 가르쳤다. 세조 5년 7월 12일, 성균관 직강 이영은 등 6명의 전도유망한 문신들이 왕에게서 ‘중용’ 강의를 들었다. 실록에는 세조가 문신의 학습을 지도한 사실이 몇 차례 더 기록돼 있다(세조 5년 7월 22일과 세조 6년 7월 7일 등).

왕이 책략가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세조는 ‘중용’을 이용해 대신을 숙청하기도 했다. 세조 4년(1458) 2월 13일, 세조는 술자리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영의정 정인지에게 ‘중용’에 관한 생각을 기탄 없이 말하라고 부탁했다. 술에 취한 정인지는 불경인 ‘능엄경’을 칭찬하고 ‘중용’을 깎아내렸다. 술자리가 파하자 세조는 정인지의 대답을 크게 문제삼고, 선비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서 정인지를 궁지로 몰아 벼슬을 빼앗았다. 공신 정인지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졌다고 판단해, 왕은 그를 숙청한 거였다.

다시 6년 뒤에는 영의정 정창손이 또 세조의 책략에 걸려들었다(실록, 세조 8년 5월 9일과 5월 10일자). 마침 세자(훗날의 예종)가 ‘중용’을 배우고 있었는데, 부왕은 세자를 칭찬하며 장차 세자의 학문이 더욱 높아지면 왕위를 넘겨줄 생각이라고 했다. 이런 말을 꺼내며 세조는 자신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슬며시 떠보았다. 그런데 정창손은 세조의 본의를 헤아리지 못했던지 왕권교체에 찬성했다. 평소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고 있었던 세조는, 정창손을 불충으로 몰아서 정승자리를 박탈했다. 참 무서운 왕이었다.

어쨌거나 왕은 ‘중용’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왕은 여러 신하를 불러서 학술토론회를 열기도 했는데, 가령 세조 10년 1월 22일에는 이맹현에게 책의 요점을 강의하게 하고 이어서 장시간 난상 토론회를 열었다. 문신들은 교대로 어려운 질문을 상대에게 퍼부었다.

세조도 논의에 직접 끼어들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질문을 연달아 쏟아냈으니, 예컨대 ‘주례’라는 책은 과연 주공의 저술이 틀림없는가를 묻기도 했다.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자 왕은 신하들에게 답변을 채근했다. 여러 선비가 의견을 말했으나 주장이 제각각이었다. 그러자 세조는 선비들과 더불어 즐겁게 술을 마신 다음에 참고서를 총동원해 가며 누구의 주장이 맞고 틀린지를 점검했다. 그날의 백미는 영순군 이부와 정현조의 심층토론이었는데, 과연 누가 더 옳은지를 아무도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깊이가 있었다.

세조는 왜, 그토록 ‘중용’을 애호했을까. 그 책에는 형이상학적 우주론과 심성론이 응축돼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왕은 철학적 논쟁을 좋아해서 이른바 이기설(理氣說)이라든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의를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왕이 ‘중용’을 사랑한 진짜 이유는 유교적 이상통치에 관한 설명이 이 책에 기록돼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조는 불교 신자였으나, 국가를 통치하는 데는 성리학이 제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점에서 왕은 세종의 든든한 후계자였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세조는 고령군 신숙주와 함께 정사를 폭넓게 의논했는데 왕은 세자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 “이 사람(신숙주)이 너의 스승이니 너는 공경할지어다!” 세조는 자신이 아끼는 고전, ‘중용’에도 대신을 공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쓰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실록, 세조 13년 8월 3일).

세조라면 단종과 충성스러운 사육신을 함부로 처단한 패륜아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알고 보면 그에게도 남달리 깊은 학식과 경륜이 있었다. 누구나 다양한 면모가 있기 마련인데, 한 면만 보고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하면 놓치는 것이 적지 않다.
2021-09-1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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