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집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역사·철학과
일과 삶은 나뉘어야 하지만 한 몸이다. 살고 싶어서 노동하는 것도 아니고, 노동하고 싶어서 사는 것도 아니다. 일과 삶을 합체해 버리고자 하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함정이다. 어떤 이는 대문호 괴테가 공무원으로 일했던 걸 아쉬워했다. 대문호에 걸맞은 격정적이고 파격적인 삶을 기대한 것이리라. 철학자 스피노자는 평생 안경과 망원경에 쓰이는 렌즈를 깎으며 살았다. 의외인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 중 참호에서 감자를 깎으며 이런 스피노자를 떠올리며 흐뭇해했다고 한다. 공무원 괴테의 삶에 실망했다면 어이없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간혹 나를 닦아세우고는 한다.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내 인생의 내 욕망을 좇는 것이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오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이익을 버리는 사람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사실 끔찍하게 어렵다. 내가 생각하는 내 생각은 거의 남에 대한 생각인 까닭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생각, 내가 증오하는 사람 생각, 내가 성공했으면 하는 생각, 내가 원하는 것을 욕망하며 떨쳐버리지 못하는 생각.
이 모두가 다른 사람의 시선과 존재를 의식한 생각들이다.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가.
고독하면 어떨까? 예수도 부처도 오래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가디언지에 실렸던 미국인 이야기이다. 이 남자는 스무 살을 막 넘기고, 그야말로 홀연히 문명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준비도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27년 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고 생활하다가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그러고는 철학자처럼 말했다. “고독은 분명 무언가 소중한 것을 더 가지게 한다. 고독함은 나의 지각력을 향상시켰다. 그런데 의아한 게 있다. 내가 내 향상된 지각력으로 내 자신을 내려다보니 그곳에 나 자신은 없었다.”
나도 고독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타르콥스키의 ‘젊은이는 고독을 감싸안을 줄 알아야 한다’는 멋진 말도 좋아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있다가 노르웨이로 갑자기 사라지고, 오스트리아 시골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며 자신을 고독이라는 울타리에 가두어 버렸다. 단연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 할 수 있는 글렌 굴드에게도 고독은 신념과 같았다. 심지어 ‘고독’을 주제로 세 시간 분량의 라디오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다. 이제 그들의 고독이 조금조금씩 이해된다.
다만 사막으로 숲으로 떠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사랑하는 사람, 나를 나이게 해 주는 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오는 언어들, 이런 것들에 둘러싸인 나는 고독을 어떻게 찾을까. 기도하며 찾을까.
2021-04-16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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