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대] 불행 배틀을 넘어서/한승혜 주부

[2030 세대] 불행 배틀을 넘어서/한승혜 주부

입력 2019-10-31 17:44
수정 2019-11-01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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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혜 주부
한승혜 주부
며칠 전 일곱 살 큰아이가 말했다. “엄마는 좋겠다.” “왜?” 하고 물으니 대답한다. “어른이니까. 나도 빨리 어른이 되면 좋겠어.” 어째서 어른이 되고 싶냐고, 어린이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냐고 되묻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친다. “엄마는 어린이가 얼마나 힘든 줄 알기나 해?”

이게 무슨 말이람. 어른이 되면 고민할 것과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웃으면서 네가 아직 뭘 몰라서 그렇다고, 이 엄마는 다시 어린이가 되고 싶다고, 지금이 행복한 줄 알라고 타이르려다가 문득 멈칫했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어린이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이 있던가? 어른이 된 지금보다 어릴 때가 더 행복했던가?

갑자기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먹고, 자고, 놀기만 하면 되니 객관적인 기준에서 지금보다 행복해야 마땅하던 시절. 그러나 그렇게 보낸 시간이 마냥 즐겁기만 했는가 하면, 정말로 아무런 걱정과 고민이 없었는가 하면 사실 그렇지는 않았던 것이다.

텅 빈 집에서 부모님을 기다리며 도무지 돌아가지 않는 것 같은 시곗바늘을 몇 번씩 확인해 봤던 기억과, 나의 의사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고 절망하던 시간과,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뒤 그저 간신히 버텨 내던 나날과, 스승의날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호출한 선생님에게 방과 후에 한참 동안 혼이 났던 기억들.

물론 지금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목숨을 위협할 만큼 심각한 사건들도, 먹고사는 문제와 관계가 있는 일도 아니었으므로.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흔한 일일지도 모르고. 그러나 감정적인 타격에 있어서만큼은 성인이 된 후 겪었던 괴로움이나 고통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삶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그저 편하고 녹록하기만 한 인생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누군가 고충을 토로하면 그것을 듣고 이해하기 이전에 객관적인 기준에서 충분히 힘들 만한지, 혹시 더 힘든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부터 우선 판가름하고 따지는 것만 같다. ‘너 힘들다고? 나는 더 힘들어. 우리 전부 다 힘드니까 징징대지 마. 예전에는 더 힘들었어, 지금은 많이 좋아진 거야’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누가 더 힘든가를 따지는 ‘불행 배틀’은 결국 모두를 패배하게 만드는 싸움이 될 뿐이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은 지구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결국 누구의 고통도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의 행복을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더 심한 폭력과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이 내가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모든 고통에는 맥락이 있으며, 우리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다. 고통의 경중이나 우열을 따지기 전에 그 맥락을 이해하고 인정할 때, 그때서야 우리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2019-11-01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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