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자의 신화로 문화읽기] 그들이 꿈꾸었던 ‘지도자’는

[김선자의 신화로 문화읽기] 그들이 꿈꾸었던 ‘지도자’는

입력 2017-03-15 22:34
수정 2017-03-2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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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자 연세대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김선자 연세대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어느 날 몽골 초원의 하늘에 일곱 개의 해가 떴다. 모든 것이 타올랐고, 사람들은 열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활 잘 쏘는 용사가 나섰다. 그는 에르히 메르겐이라 불렸다. ‘에르히’는 ‘엄지’라는 뜻이고, ‘메르겐’은 만주나 몽골 지역의 민족들이 활 잘 쏘는 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에르히 메르겐은 용사였다. 일곱 개의 해를 쏘아 떨어뜨리지 못하면 자신의 엄지를 자르겠다고 맹세했다. 활 쏘는 용사가 엄지를 자른다는 것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놓겠다는 뜻이다. 명사수의 화살이 빗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여섯 개의 해를 모두 떨어뜨리고 마지막 하나를 향해 화살을 날리는 순간 공교롭게도 제비 한 마리가 지나갔고, 그 꼬리에 화살이 맞으면서 해 하나를 맞히지 못했다. 제비 꼬리가 갈라져 있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하는데, 자기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르히 메르겐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면서 자신의 엄지를 잘랐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 몽골 사람들의 먹을거리인 타르바가(마모트)로 변했다.

만주와 몽골 신화의 메르겐들은 활을 잘 쏠 뿐 아니라 마을에 닥친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한다. 다우르족의 메르겐은 마을 사람들을 질병에 빠뜨린 요괴와 싸워 해독초를 찾아 돌아오다가 기진맥진해 죽어 간다. 사람들은 초원에서 약초를 캐내고 난 후 파헤친 땅을 다독여 원래 모습대로 해 두었다. 자신들을 위해 해독초를 찾아오고 자신을 희생한 메르겐의 몸이 바로 그 초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창세신화에 등장하는 대별왕 역시 메르겐의 계보에 속한다. 천신의 아들 대별왕도 하늘에 떠오른 두 개의 해와 달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대별왕은 동생인 소별왕과 누가 세상을 다스릴 것인가를 두고 꽃피우기 내기를 하다가 동생의 속임수 때문에 이승을 넘겨주고 저승을 관장하게 되지만, 동생이 도와달라고 할 때 서슴없이 나서서 해와 달을 쏜다. 이렇게 활을 쏘아 하늘에 뜬 여러 개의 해를 떨어뜨리는 영웅들은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신화에 골고루 등장한다. 중국 신화의 대표적 주인공 예도 그러했다. 예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떠오른 열 개의 해 중에서 아홉 개를 쏘아 떨어뜨려 인간을 고통에서 구해 준다. 하지만 천신의 아들인 해들을 쏘아 떨어뜨렸기에 천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였는지 그는 천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서 비극적 삶을 마감한다.

이처럼 뛰어난 능력과 지혜, 용기로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해 주는 ‘메르겐’은 동아시아 신화 곳곳에 등장하는데,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활 솜씨를 가졌다. 그러나 누군가를 죽이고 정복하기 위해 활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명을 죽이는 활쏘기가 아니라 살리는 활쏘기를 한다. 남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병과 재앙에서 마을 사람들을 구해 내기 위해 활을 들고 모험의 길을 떠난다. 그 길에서 때로는 생명을 잃기도 한다. 힘센 요괴가 숨죽이고 있을 때에는 추적하여 찾아내는 지혜로운 면모도 보이고, 자신의 자리를 빼앗아 간 동생을 용서하는 도량도 보인다.

그들은 강인하고 지혜로우며 자기희생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직적 계보의 정점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마을의 지도자라고 해도 메르겐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부여돼 있지 않다. 다만 남들보다 특출한 능력을 지녔고 책임감이 있으며 좀더 지혜롭기에 지도자가 됐을 뿐이다. 평등의식을 바탕으로 한 수장(首長)들이 사라지고 수직적 위계질서의 정점에 위치한 왕(王)의 권력이 국정을 농단하는 시대, 지도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존재가 아님을, 우리와 수평적 관계에 있으면서 우리를 대신해 자신의 지혜를 바탕으로 공동체를 지키고 스스로를 희생할 준비가 돼 있는 인물이어야 함을 다시 일깨워 주는 신화들이다.
2017-03-1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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