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민아의 일상공감] 말하기 정석

[배민아의 일상공감] 말하기 정석

입력 2019-07-02 17:22
수정 2019-07-03 14:16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이미지 확대
배민아 미드웨스트대 교수
배민아 미드웨스트대 교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소녀의 처음 세상은 마치 우주가 소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모든 것이 우호적이고 만만한 세상이었다. 변변한 가방도 없이 등교하던 학생들 틈에서 당당히 통가죽 가방을 메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그때만 해도 모두의 부러움 속에 온갖 자신감이 충천했던 소녀는 일년이 채 안 돼 넓은 세상, 서울로 간다.

전학 온 학교에서 첫 수업을 하던 날 세련되고 예뻤던 서울의 선생님은 소녀에게 인사 겸 교과서 낭독을 시켰고, 시골에서도 이미 한글 읽기쯤은 완벽하게 학습한 터라 낭랑한 목소리로 교과서를 읽던 중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이내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때 소녀는 깨달았다. 작은 시골에서 배우고 사용했던 말은 서울 말씨와는 다른 언어였다는 것을, 대화만이 아니라 책을 읽을 때도 사투리 억양은 감출 수 없다는 것을, 또 해맑은 웃음이 경우에 따라 충격과 상처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동안 소녀를 주인공으로 비추던 조명등이 갑자기 꺼진 것 같은 문화 충격에 빠진 그날 이후 두 살 터울의 오빠와 매일 서울 말씨를 흉내 내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지만 쉽게 서울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갓 전학 온 시골 소녀에게 대표 책 읽기를 시켰던 선생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전학생의 자신감을 북돋우려는 취지였다고 좋게 생각하더라도 몇몇 아이들의 웃음을 전체 폭소로 번지도록 방조했을뿐더러 오히려 더 크게 웃던 선생의 환한 미소는 그날 이후 소녀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선생을 미워하던, 말하기에 두려움을 가진 그 소녀는 후에 말하는 것을 업으로 살아가는 선생이 됐다.

처음으로 강의를 준비하던 때의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강의록에 쉬어 갈 자리와 유머 코드까지 체크하고, 녹음과 반복 재생으로 말의 크기와 높낮이, 시선과 제스처, 청중의 반응에 따른 여러 변수 등을 체크하며 철저한 준비와 연습으로 자신만의 말하기 수련법을 터득했고, 이제는 조금씩 말하기의 고수가 돼 간다.

말을 잘하기 위한 첫째 정석은 청중이 원하는 말을 하는 것이고, 청중과 더불어 공감하며 말하는 것, 즉 청중의 요구를 끊임없이 살피며 상대의 반응에 세심하게 귀 기울이는 것임을 터득하게 된 계기가 그 1학년 교실에서 비롯됐으니 소녀의 입을 닫게 한 선생은 본의 아니게 소녀의 인생 스승으로 남았다.

요즘은 말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거침없이 의사 표현을 하고, 1인 방송이라는 매체로 혼자서도 주절주절 말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그렇다 보니 일방통행식의 말하기에 점차 익숙해져 가는 듯하다.

우리의 만남 가운데서도 혼자만 말하고, 대화의 주도권을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사람과 대화하는 일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반복되는 말이 많을뿐더러 자신 외에는 알아듣기 힘든 말만 하게 된다.

말이 많다는 것은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상대를 자신의 스트레스 푸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정신과 전문의나 상담가들에게 말을 하고 돈을 지불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인이 말을 하고 싶은 만큼 상대의 말도 들어 줘야 서로가 만족하는 대화가 된다. 소통이라는 것은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이기 때문이다.

간혹 말을 많이 한 순서대로 밥값을 내게 하는 법이라도 생기면 재밌겠다는 생각도 든다.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이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누군가와의 만남에서 과한 기분으로 너무 많은 말을 쏟아냈다면 상대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밥값을 지불해야겠다.
2019-07-03 34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출산'은 곧 '결혼'으로 이어져야 하는가
모델 문가비가 배우 정우성의 혼외자를 낳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에 많은 충격을 안겼는데요. 이 두 사람은 앞으로도 결혼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출산’은 바로 ‘결혼’으로 이어져야한다는 공식에 대한 갑론을박도 온라인상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출산’은 곧 ‘결혼’이며 가정이 구성되어야 한다.
‘출산’이 꼭 결혼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