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훈민정음 해례본과 관련해 뒤늦은 소유권 분쟁이 전개되고 있다. 이 사건의 사실 결과는 대법원 판결이 나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유권에 대한 시시비비를 판단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가 소유라고 부를 수 있는 범위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과연 우리는 내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보는가? 이 질문에 대한 궁리엔 다분히 입체적인 접근이 요청된다. 법적이고 공리적 판단의 잣대를 넘어선 판단이 그것이다. 너머의 판단은 소유한다는 개념에 대한 질문의 재고를 전제하고 있다.
본래 소유란 그 본류를 거슬러 추적하면 공유의 지점으로까지 올라간다. 공적, 사적 소유란 식의 구분을 넘어서서 한 사회,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갖고 있는 이른바 소유는 그 개념이 나 아닌 다른 이, 이웃으로부터 빌려 온다는 개념과 긴밀히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훈민정음, 더 쉽게 말해 한글의 예를 살펴보면 소유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더욱 명확해진다.
한 국가의 ‘문자’가 갖는 중요성은 훈민정음의 창제자인 세종의 거국적인 판단과 결단에 의해서만 부각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만의 문자를 갖자는, 소박하지만 도저하게 타오르던 열망은 결국 공동체 모두의 고민이 내재적으로 퇴적된 가시적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세종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자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길의 열림을 염원했다. 그에 따른 집요한 노력의 집대성이 훈민정음이요, 그 과정에 대한 특별한 전리품이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기록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한글은 상식의 눈으로 봐서도 한글을 쓰고, 읽고, 사용하는 모든 이들의 공유물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공유의 출발점은 구성원 모두에게 내재된 염원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염원의 기반은 상호간 소통, 보다 원활한 언어의 교감에 있다. 교감이란 결코 단독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일 수밖에 없으며, 공유되는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이른바 선의의 부채의식 위에 존재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듯 상식의 관점에서만 소유를 논한다면, 사실상 소유를 독점으로 간주하는 태도, 그 태도에 입각한 일련의 접근은 설령 통념의 관점에선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지언정 분명 비상식적 원리에 경도된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 우리가 소유한 것들은 독점에 뿌리를 둔 이기주의의 그릇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공유의 뿌리 위에서 독점 너머에 존재하는 함께 나눔, 선의의 부채의식으로 수용되는 사용자로서의 그릇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에선 누구도 소유와 공유를 등가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이 경우 가장 큰 문제는 독점의 정서로 점거된 소유에 대한 광적 집착이 우리 사회의 상식, 통념, 문화적 합의를 우습게 깔아뭉개고 편법 내지 불법에 준하는 도덕적 해이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문화계 전반에 번진 표절 시비에서부터 특허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법적 공방의 이면에 공존의 통로로 협의되는 선의의 사용자 의식이 아니라 독점의 광기를 통해 일그러진 병리적 소유욕이 만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문화의 경우만 봐도 소유와 독점 개념의 혼란 양상이 이러할진대, 부동산으로 대표되는 본격적인 재화의 영역에서 위세를 부리는 독점 소유욕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사용하는 아름다운 한글조차 소유가 되어버린 사회, 공유의 미덕을 더 이상 상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를 지배하는 건 우울하게도 획일화된 가치와 기준뿐이다. 독점욕의 비극적 말로는 상대적 비교우의에서의 자기 소유 과시와 인정욕구밖에 남지 않은 형해뿐인 사회다. 독점과 욕망으로 무장된, 앞뒤 꽉 막힌 소통불능의 벽은 반드시 허물어져야 한다. 건강한 붕괴가 없는 사회를 건강하다고, 상식적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위선적인 태도는 없다. 비정상으로 점철된 소유개념의 종말을 고하는 것, 그것이 상식과 문화적 다양성을 말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되어줄 것이다.
주원규 소설가
본래 소유란 그 본류를 거슬러 추적하면 공유의 지점으로까지 올라간다. 공적, 사적 소유란 식의 구분을 넘어서서 한 사회,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갖고 있는 이른바 소유는 그 개념이 나 아닌 다른 이, 이웃으로부터 빌려 온다는 개념과 긴밀히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훈민정음, 더 쉽게 말해 한글의 예를 살펴보면 소유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더욱 명확해진다.
한 국가의 ‘문자’가 갖는 중요성은 훈민정음의 창제자인 세종의 거국적인 판단과 결단에 의해서만 부각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만의 문자를 갖자는, 소박하지만 도저하게 타오르던 열망은 결국 공동체 모두의 고민이 내재적으로 퇴적된 가시적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세종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자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길의 열림을 염원했다. 그에 따른 집요한 노력의 집대성이 훈민정음이요, 그 과정에 대한 특별한 전리품이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기록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한글은 상식의 눈으로 봐서도 한글을 쓰고, 읽고, 사용하는 모든 이들의 공유물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공유의 출발점은 구성원 모두에게 내재된 염원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염원의 기반은 상호간 소통, 보다 원활한 언어의 교감에 있다. 교감이란 결코 단독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일 수밖에 없으며, 공유되는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이른바 선의의 부채의식 위에 존재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듯 상식의 관점에서만 소유를 논한다면, 사실상 소유를 독점으로 간주하는 태도, 그 태도에 입각한 일련의 접근은 설령 통념의 관점에선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지언정 분명 비상식적 원리에 경도된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 우리가 소유한 것들은 독점에 뿌리를 둔 이기주의의 그릇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공유의 뿌리 위에서 독점 너머에 존재하는 함께 나눔, 선의의 부채의식으로 수용되는 사용자로서의 그릇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에선 누구도 소유와 공유를 등가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이 경우 가장 큰 문제는 독점의 정서로 점거된 소유에 대한 광적 집착이 우리 사회의 상식, 통념, 문화적 합의를 우습게 깔아뭉개고 편법 내지 불법에 준하는 도덕적 해이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문화계 전반에 번진 표절 시비에서부터 특허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법적 공방의 이면에 공존의 통로로 협의되는 선의의 사용자 의식이 아니라 독점의 광기를 통해 일그러진 병리적 소유욕이 만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문화의 경우만 봐도 소유와 독점 개념의 혼란 양상이 이러할진대, 부동산으로 대표되는 본격적인 재화의 영역에서 위세를 부리는 독점 소유욕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사용하는 아름다운 한글조차 소유가 되어버린 사회, 공유의 미덕을 더 이상 상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를 지배하는 건 우울하게도 획일화된 가치와 기준뿐이다. 독점욕의 비극적 말로는 상대적 비교우의에서의 자기 소유 과시와 인정욕구밖에 남지 않은 형해뿐인 사회다. 독점과 욕망으로 무장된, 앞뒤 꽉 막힌 소통불능의 벽은 반드시 허물어져야 한다. 건강한 붕괴가 없는 사회를 건강하다고, 상식적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위선적인 태도는 없다. 비정상으로 점철된 소유개념의 종말을 고하는 것, 그것이 상식과 문화적 다양성을 말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되어줄 것이다.
2012-10-1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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