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사 갑질때문에…국내 첫 태블릿PC ‘케이패드’의 잔혹사

이통사 갑질때문에…국내 첫 태블릿PC ‘케이패드’의 잔혹사

입력 2016-05-22 10:21
수정 2016-05-22 10:21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개발사 엔스퍼트, KT 발주 취소로 심각한 경영난

KT는 2009년 애플 아이폰을 처음 출시하면서 단말기 지원금을 전액 부담했다. 애플의 고자세에 통상 제조사와 함께 지원금을 부담하던 관례를 깼다.

그러자 애플의 라이벌인 삼성전자가 발끈했다. 삼성전자는 당시 출시를 준비하던 태블릿PC ‘갤럭시 탭’을 KT의 경쟁사인 SK텔레콤에만 공급키로 했다. 적의 적을 동지로 받아들인 셈이다.

태블릿PC 시장을 누가 선점하느냐가 뜨거운 관심사였던 상황. 발등에 불이 떨어진 KT는 부랴부랴 엔스퍼트라는 중소기업을 찾아가 갤럭시 탭에 맞설 수 있는 태블릿PC 개발을 재촉했다.

국내 최초의 태블릿PC로 알려진 ‘케이패드’(K-Pad)는 이렇게 탄생했다. KT는 SK텔레콤이 갤럭시 탭을 출시하기 수십일 전에 케이패드를 재빠르게 선보여 소비자 관심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바로 암초가 드러났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기식으로 개발한 신제품은 곳곳에서 말썽을 일으켰다. 화면이 수시로 정지되고, 배터리가 빨리 소모되고, GPS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등의 하소연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뒤덮었다.

엔스퍼트에 케이패드 3만대를 우선 주문하고, 17만대를 추가 주문한 KT는 구매자 반품 요청이 줄을 잇고 회사 이미지에 타격이 우려되자 돌연 17만대 주문 계약을 사실상 취소해버렸다.

금융 비용과 부품 업체들의 대금 독촉에 시달리며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된 엔스퍼트는 KT에 눈물 젖은 편지를 보냈다.

“부채 250억원의 상환 압박에 시달리고, 40여개 협력 업체들이 줄도산 위기에 있습니다. 부디 잘 해결해주면 KT의 성공을 위해 미약하나마 기여하는 중소기업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KT는 2011년 초 케이패드 판매를 중단했고, 17만대 주문 계약은 그대로 없던 일이 됐다. 이후 심각한 경영난에 빠진 엔스퍼트는 기사회생하지 못하고 이듬해 증시에서 퇴출되기까지 했다.

사건 당시 KT의 매출은 엔스퍼트의 526배에 달했다. 엔스퍼트는 매출 총액의 48%를 KT에 의존하고 있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KT가 모든 잘못을 엔스퍼트에 뒤집어 씌우고 임의로 계약을 취소했다며 2014년 6월 뒤늦게 20억8천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KT는 공정위를 상대로 과징금 취소 소송에 나섰다.

그리고 최근 법원은 소송 제기 2년 만에 공정위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KT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해도 될 만큼 케이패드의 하자가 심각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갤럭시 탭에도 비슷한 하자가 있었고, 이런 하자들이 금세 보완·개선됐기 때문이다.

특히 엔스퍼트가 케이패드를 개발하고 납품하기까지 걸린 기간이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짧았다고 지적했다. KT의 요구 때문이었다.

법원은 “원 사업자가 종속 관계에 있는 많은 수급 사업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방법은 하도급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시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 관계자는 “고래등 같은 제조사와 이통사 간의 싸움에 새우 같은 중소기업이 끼어 희생된 모양새”라며 “KT가 대법원에 상고할 가능성이 크다.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