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더이상 내집마련 디딤돌 아니다”’렌트 푸어’ 양산 우려
올해 전세대출이 사상 최대로 늘어날 전망이다.전세보증금을 내집 마련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기는 커녕 거액의 전세대출을 받는 것이 보편적인 현실이 되면서 ‘렌트 푸어(전세 빈곤층)’만 양산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일 금융당국과 은행권에 따르면 지난 2011년 말 18조2천억원이었던 전세자금대출은 2012년 말 23조4천억원으로 늘어난 데 이어 지난해 말 28조원, 올해 8월 말 32조8천억원으로 급증했다.
올해 들어 8개월 동안 4조8천억원이 늘어난 만큼 올해 연간으로는 7조원 넘게 늘어나 연말이면 전세대출이 35조원에 달할 것으로 금융당국은 전망했다.
증가율로 따지면 한 해에 무려 25%에 달한다. 이는 올해 들어 10월까지 아파트 전셋값 평균 상승률인 3.65%에 비해 상당히 높다.
전문가들은 전세대출이 구조적으로 급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금껏 전세보증금 마련에 있어 본인 스스로 저축 등을 통해 마련한 자금으로 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절대적인 전세 가격이 너무 오른 지금은 은행 대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전셋값이 1억5천만원일 때 10% 올라가면 1천500만원만 마련하면 되지만 3억원일 때 10%는 3천만원에 달한다”며 “2년 만기가 돼 재계약하는 기존 세입자, 새 전셋집을 구하는 신혼부부 등이 은행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회사원 김모(42)씨는 “예전에는 2천만원, 3천만원씩 전셋값을 올려줬지만, 올해는 인상폭이 5천만원이나 된다”며 “되도록 은행 빚을 안 지려고 애쓰지만 2년 동안 5천만원을 모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올해 아파트 전세가격 상승률은 3.65%지만 2년 만기 후 재계약을 하는 세입자는 지난해 전세가격 상승률(7.15%)까지 더해 전셋값을 올려줘야 하기 때문에 김씨와 같은 사례는 속출할 수밖에 없다.
최근 결혼한 정모(35)씨는 “신혼집을 구하다 보니 서울에서 전셋값이 2억원이 안 되는 집을 찾을 수 없었다”며 “결국 내가 모아놓은 돈과 부인의 돈 외에 1억원이 넘는 전세대출을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더구나 올해 급증한 전세 대출은 국민주택기금을 재원으로 하는 저금리 전세대출이 아닌 은행 자체 대출이어서 금리 부담이 훨씬 크다.
올해 들어 국민주택기금 전세대출은 9월까지 1조4천억원 늘어나는데 그쳤다. 연 3.3%의 저금리이지만 부부 합산 소득이 5천만원 이하여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국민·신한·하나·농협·기업·외환은행 등 7개 시중은행의 자체 전세대출은 10월까지 4조원 넘게 늘었다. 농협은행의 전세대출 금리가 연 4.1%에 달하는 등 고금리이지만 조건에 제한이 없어 대출이 급증했다.
전세대출은 대부분 주택금융공사의 원금 90% 상환 보증을 받기 때문에, 은행들로서는 주택담보대출에 비해 금리는 높으면서 위험은 더 낮은 ‘알짜배기 수익원’을 발굴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전세대출의 급증이 ‘렌트 푸어’의 양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거액의 전세대출을 받게 되면 전세보증금을 내집 마련의 디딤돌로 삼아 중산층으로 올라가려는 의지 자체가 꺾이게 된다”며 “내집 마련은 커녕 전세대출금 상환도 허덕이는 ‘렌트 푸어’가 양산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이에 따라 저금리 전세대출 확대, 시중은행 전세대출의 금리 인하 등의 개선책을 제안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최근 시중은행의 전세대출이 늘어나는 양상을 보면 가계대출에서 또 하나의 ‘폭탄’이 커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며 “비정상적으로 높은 월세를 낮춰 건전한 월세 시장을 양성하는 등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