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화 약세로 엔저 제동…당장 아베노믹스 기조에 큰 충격 없을 듯
달러·엔 환율이 약 한 달 만에 100 엔 밑으로 떨어지면서 작년 말 이후 계속되던 거센 엔화 가치 하락 흐름에 일단 제동이 걸렸다.이에 따라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가 추진하는 ‘아베노믹스’ 정책 전반과 한국 경제·증시 등에도 상당한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 100엔선 왜 무너졌나…미국 경제지표 부진으로 달러화 약세
달러·엔 환율은 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외환시장에서 100 엔의 벽을 깨고 99엔대 중반까지 내려갔다.
달러·엔 환율이 뉴욕 외환시장에서 100 엔 밑으로 떨어진 것은 지난달 9일 100엔 선을 넘어선 이후 25일 만에 처음이다.
달러·엔 환율은 이날 장중 한때 달러당 98.86엔까지 내려갔다가 4일 오전 10시 10분 현재 도쿄 외환시장에서 대략 99.51∼99.56엔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한때 103엔까지 넘어섰던 달러·엔 환율이 이처럼 하락한 가장 큰 배경은 미국 경제 지표의 부진이다.
그간 미국 경제의 본격적 회복 징후와 이에 따른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가능성으로 인해 달러화 강세가 지속됐고, 이는 엔저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날 미국 경제 지표가 안 좋게 나온 여파로 이러한 흐름이 뒤집어지면서 엔저에 제동을 걸었다고 시장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이날 미국 공급관리자협회(ISM)가 발표한 5월 제조업지수는 시장 예측치(50.7)에 못 미치는 49.0에 머물렀다.
이 지수가 경기 확장과 위축을 가르는 기준치 50을 밑돈 것은 지난해 11월 이후 처음이며, 5월 지수로는 2009년 6월 이후 가장 낮은 수치이다.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4월 민간·공공 건설 프로젝트 지출 규모도 전월 대비 0.4% 증가에 그쳐 예측치(0.8∼0.9% 증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에 뉴욕증시는 양적완화가 지속하리라는 기대감에 오히려 상승했고 달러화는 약세로 돌아섰다.
데이비드 로드리게스 데일리FX닷컴 분석가는 마켓워치에 “뚜렷이 실망스러운 ISM 지표가 촉매로 작용했다”며 “(지표 발표와) 거의 동시에 달러-엔 100엔 선이 깨진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동안 강세를 지속한 달러화를 “사람이 너무 많이 탄 배”에 빗대어 “아무도 침몰 중인 배에 마지막으로 남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며 지표 부진을 만나 달러 매도세가 촉발된 것으로 분석했다.
시장에서는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여부와 향후 미국 경제 지표에 따라 달러·엔환율의 방향성과 변동폭이 결정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특히 미국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오는 7일의 5월 고용동향 발표가 중요한 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아베노믹스 기조, 당장은 큰 타격 없을 듯
달러당 100 엔 선은 무너졌지만 일단 현재까지는 엔저와 아베노믹스의 기조 자체가 뒤집힐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달러·엔 환율은 작년 하반기 70엔대 후반에서 최근까지 이미 20% 가량 급등했다.
이에 따라 환율이 추가로 급락하지만 않고 현재 수준에서 안정된다면 아베노믹스에 당장 큰 악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일본 당국자들도 그간 엔화 가치가 과도하게 내려가면 수입물가 폭등 등 적지 않은 부작용을 수반할 것이라며 경계감을 표시해왔다.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일본 경제재정·재생담당상은 지난달 중순 엔화 환율이 달러당 102 엔대를 넘어서자 “과도한 엔저도, 엔고도 경제에는 마이너스라는 게 전문가들의 이야기”라고 밝혔다.
아마리 경제재정상은 4일에도 그간 엔화 가치 하락과 증시 상승이 “극히 빨리 진행됐다”며 따라서 조정 기간이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밝혔다.
특히 그간 일본 국채 가격이 급락함에 따라 외화가 국외로 대량 유출, 엔화 가치가 대폭 추락하는 극단적인 시나리오의 가능성까지 일각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엔화 가치 하락에 제동이 걸리면서 오히려 이러한 우려가 불식되는 효과도 기대된다.
따라서 일본 당국은 앞으로 당분간 엔 환율의 지나친 급락이나 급등을 피하고 현재 수준에서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양적완화와 엔저가 이제 어느 정도 효과를 냈다고 판단하고, 앞으로는 아베노믹스 ‘제3의 화살’인 구조개혁 조치에 힘을 실어 기업 투자와 경제 활성화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 엔저 제동…한국 증시에는 단기적 호재
증시 전문가들은 엔저에 제동이 걸린 것은 단기적으로 한국 증시에 긍정적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동안 국내 증시가 주요국 증시와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을 보인 주 요인 중 하나가 엔저이므로 수출 업종을 중심으로 가치가 재평가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이재훈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달러당 99엔이냐 100엔이냐는 사실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 측면에서 현대차 등 저평가됐던 기업이나 업종에는 개선의 의미가 충분히 있다”고 분석했다.
마주옥 키움증권 연구원도 “엔화 약세가 저지되면 일본과 우리 증시가 상당 부분 대체 관계에 있으므로 (외국인 자금이) 우리 증시로 향할 것이라는 기대는 있다”고 말했다.
한범호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엔화 약세 속도 둔화와 일본 시중 금리 안정의 조합은 하반기 국내 증시가 디커플링의 덫에서 벗어나는 또 하나의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현재 엔저가 주춤한 원인이 미국 경제지표의 부진이라는 점에서 현재 상황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데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또한 일본 아베노믹스의 실패가 한국 경제에도 결국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급격한 환율 변동 없이 100 엔 안팎의 현재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는 진단도 나왔다.
마주옥 연구원은 “대규모 자금 유출 가능성이 있는 만큼 글로벌 금융시장에는 아베노믹스와 엔저가 현재 수준에 머물러 주는 게 좋다”고 지적했다.
코스피는 4일 전일보다 8.81포인트(0.44%) 오른 1,998.38에 개장했다.
오전 10시 1,988.37로 내려갔다가 10시 30분에는 1,991.49로 오르는 등 보합권에서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 원·달러 환율 하락 압력…급락 가능성은 작아
달러·엔 환율 하락은 국내 외환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원·달러 환율의 하락 요인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이 조기에 양적완화를 종료하는 출구전략에 나설 것이라는 예상에 급상승하던 달러화 가치가 최근 조정을 받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달러화가 약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손은정 우리선물 연구원은 “원·달러 환율이 최근 달러·엔 환율과 동조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엔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상승하면서 아베노믹스의 ‘상징적 환율 수준’으로 일컬어지던 달러당 100엔을 하향 돌파함에 따라 원·달러 환율도 달러당 1,120원 밑으로 내려갈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미국 달러화 강세와 엔저 기조가 마감했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며, 따라서 원·달러 환율이 큰 폭으로 하락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한 외환시장 참가자는 “미국 양적완화 축소 여부를 판단할 고용지표가 아직 발표되지 않아 추가적인 원·달러 환율 하락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당분간 1,120원을 중심으로 등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승지 삼성선물 연구원은 “가파르게 진행되던 미국 달러화 강세가 지난주부터 조정을 받는 국면”이라면서도 달러화 강세 기조는 앞으로도 완만하게 진행될 것으로 내다봤다.
게다가 엔저 행진이 중단될 우려와 일본 증시의 거듭된 급락으로 금융시장의 불안이 커질 경우 오히려 달러화 같은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심리가 강해져 원·달러 환율의 하락을 상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한 시중은행 외환 딜러는 “오는 5일 아베 총리의 경제진단 연설을 앞두고 달러·엔 환율이 다시 달러당 100엔을 회복할 가능성도 있다”며 “아베 총리가 발표할 경제 성장 전략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