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질 부분 책임” 선제 대응…그룹 정상화 주목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3일 검찰의 그룹 압수수색 2주만에 고개를 숙였다. 전 임직원들에게 e메일을 보내 참담한 심경과 사과의 뜻을 전하고 동요하지 말 것을 거듭 당부했다.이번 사태를 더 이상 방치할 경우 그룹에 최악의 위기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그룹 장손에서 재계 14위 대기업의 수장, 검찰 수사대상으로 이어지는 이 회장의 굴곡진 인생 행로가 분수령을 맞고 있는 것이다.
◇ “책임지겠다” 선제 대응…그룹 정상화 결단 = 이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e메일을 보낸 것은 검찰 수사로 촉발된 ‘비자금 사태’로 인한 그룹의 동요를 조기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그룹의 안정적 경영을 위해 취해졌던 각종 조치 중에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제가 책임을 질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저를 도와준 임직원들의 과오가 있다면 그 또한 저에게 책임이 있음을 밝힌다”는 뜻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는 검찰 수사의 칼 끝을 피해 나가려 하는 생각이 없다는 심중을 간접적으로 내비친 것으로도 해석된다.
나아가 설령 검찰 수사 결과로 최악의 상황이 온다고 해도 CJ그룹의 악영향을 미치는 ‘경영 위기” 국면으로까지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의지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 된다.
이 회장이 “저의 잘못과 부덕의 소치로 인해 임직원과 회사가 더 이상 고통받고 피해를 겪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 사태로 여러분이 흔들려선 안된다”면서 “우리 CJ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하나 마음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회장이 비자금 사태로 CJ그룹 경영이 타격 받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뜻을 담은 것 아니겠느냐”면서 “향후 CJ측 움직임이 주목된다”고 말했다.
◇ 검찰수사 내몰리는 ‘삼성가의 장손’ 이재현 회장 = 이 회장은 삼성가의 3대 장손이긴 하지만, 스스로 CJ그룹을 현재 자리에 올린 창업주와 같은 독특한 위치에 서 있는 게 사실이다.
부친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이병철 삼성 선대회장의 맏아들이긴 하지만, 이건희 삼성회장과의 후계 구도에서 밀리며 사실상 제일제당만을 받아들고 그룹을 스스로 일궈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의 굴곡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삼성그룹과 계속되는 악연이다.
양측의 악연은 제일제당 분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병철 회장 사후 이재현 회장의 어머니 손복남 여사는 안국화재 지분 15.6%를 이건희 삼성 회장의 제일제당 지분과 맞교환, 회사를 넘겨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분리를 반대하는 삼성과의 갈등의 씨가 내재됐다는 것이 CJ측의 주장이다.
삼성과 신경전은 2011년 CJ의 대한통운 인수 과정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삼성SDS가 뒤늦게 포스코와 손잡고 인수전에 뛰어들며 CJ와 양자구도를 형성 반발을 샀고, 지난해부터 이맹희 회장과 이건희 회장 사이의 뒤늦은 상속 소송이 벌어지며 양측간 갈등이 극에 달했다.
이 회장에 대한 삼성 직원의 미행 사건이 지난해 2월 터졌고, 같은해 11월에는 고 이병철 회장의 선영 참배를 놓고 실랑이가 이어지기도 했다.
◇ ‘비자금 수사’로 최대 위기 봉착 = 이번 비자금 수사로 CJ그룹이 창사 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이 재계와 법조계의 중론이다.
검찰이 그룹 본사와 경영연구소에 이어 이 회장의 장충동 자택을 압수수색한 것은 과거 재벌 오너를 정면 겨냥할 때와 비슷한 수순이다.
그룹 측은 이번 문제가 ‘비자금’이 아니라 선대 회장부터 내려온 차명재산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으나 사안의 흐름이 심상치 않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룹 자금 일부가 개인 재산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증언이 속속 나오고 있는 데다 , 비자금 의혹이 국내 뿐 아니라 해외로까지 연계되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더욱이 검찰 수사가 비자금과 맞물려 교묘하게 이어진 주식거래와 탈세 의혹은 물론 자녀에 대한 증여 문제까지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라 비자금 파문의 종착점이 어디로 치달을지는 현재로선 예단할 수 없다.
이 회장이 이메일로 자신의 입장을 내놓은 배경도 이 같은 분위기를 감안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재계 안팎에선 삼성 계열사에서 시작한 CJ의 성장세가 크게 휘청거릴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CJ그룹은 1995년 매출 1조7천300억원에서 지난해 매출 26조8천억원을 돌파, 20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15배 넘는 급성장을 이어왔다.
기존 식품 중심 사업 구조에서 ▲바이오·생명공학 ▲엔터테인먼트·미디어 ▲물류·신유통 등 사업군을 추가, 4대 사업군 체제를 구축했다는 게 자체 평가다.
다만 최근엔 글로벌 경기 침체와 내수 부진의 영향으로 제일제당을 비롯한 주요 계열사들이 고전을 거듭해 왔다.
그룹 매출의 3분의 1을 담당하는 주력 회사인 CJ제일제당은 올 1분기 영업이익이 작년 동기대비 11.8% 줄었다. 2011년 말 인수합병을 통해 자회사로 편입한 물류회사 CJ대한통운을 합하면 영업이익 감소 폭은 21%에 달한다.
엎친 데 덮친 격인 검찰 수사 이후에는 전사적 ‘비상경영’을 본격화하고, 조직내 동요를 최소화하는 데 주력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번 검찰 수사의 영향이 장기화할 경우 ‘매출 30조원’을 비롯한 그룹의 또 한차례 도약이 아무래도 늦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우세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