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약한 어느 강도의 이야기

심장 약한 어느 강도의 이야기

입력 2010-02-08 00:00
수정 2010-02-0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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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도둑치고도 희한한 도둑이 다 있더군. 서울 마포경찰서는 2일 허(許)모(24·경남 양산군(현 양산시))씨를 강도혐의로 구속했는데 이 친구의 한 짓이 어이없더군.

이 친구, 김(金)모(42·마포구 서교동)씨 집에서 함께 자고 이날 아침 6시30분쯤 일어나서는 느닷없이 김씨의 배 위에 걸터타고는 과도로 위협, 김씨의 손발을 묶어놓고는 전날밤 함께 마시다 남은 매실주를 자기도 마시고 김씨에게도 먹이며 돈을 내어 놓으라고 졸라댔던 모양이야. 김씨가 돈이 없다며『젊은 사람이 그래서 되겠냐』고 설교하자 나중에는『듣기 싫다』며 수건으로 입을 틀어 막고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그 위에다 이불을 덮어 씌운 뒤 양복 2벌, 내의, 구두 등을 털어 도망쳤어.

이때가 10시30분쯤이었다니까 무려 4시간 동안 이런 짓을 했던 게 아니겠어. 그러고는 서울역까지 달아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김씨가 숨이 막혀 죽지 않았나 걱정이 되더라는 거야. 그래서 김씨의 집으로 되돌아갔어. 이때 마침 김씨는 겨우 결박을 풀고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나길래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더니 강도놈이 돌아왔지 않겠어. 이놈이 날 죽이러 왔구나. 벌떡 이렇게 생각한 김씨, 몽둥이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지. 그러나 들어오는 놈을 차마 내리치지는 못했어. 마침내 둘이 방안에서 격투를 벌였지. 고함소리를 듣고 길가던 경찰관이 달려와 허를 잡았는데….

D=김씨라는 양반, 억세게 마음이 약해 빠졌군.

E=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성경말씀대로 오른뺨을 맞고 왼뺨을 내어 놓은 격이었어. 그때까지의 둘의 관계를 들어 보라고.

둘이 처음 만난 것은 지난달 18일 적십자병원 혈액원에서 피팔때였지. 서로 신세타령 끝에 친해졌던 모양이야. 김씨는 미장이로 홀아비고 허는 애인과 함께 무작정 상경했다는 거였어. 그래서 김씨는 허와 함께 그 애인까지 집에 데려다 먹이고 재우며 용돈까지 5백원가량 주었다는 거야.

그런데 지난달 20일 둘이 피팔러 갔었는데 어느새 허가 혼자 도망쳐 김씨집에서 애인과 함께 쌀, 「라디오」, 양복등을 훔쳐 달아나 버렸어. 그러다가 1일 다시 혈액원에서 만났지. 김씨는 허를 다시 집에 데려다 놓고 설교를 시작했는데 자고 나자 허는 이번에는 한수 더 떠 강도로 돌변했던 거야.

A=가난 속에서도 순박한 인간미를 잃지 않은 사람이군.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인간미야. 허라는 친구도 강도치고는 순박한 치기같은 게 있어 인간미가 있군.

[선데이서울 73년 2월 18일호 제6권 7호 통권 제 2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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