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공부(文公部) 제정 제1회 창작활동 지원 대상 선정 기념공연 『수로부인(水路夫人)』의 공연을 끝낸 강선영(姜善泳·45)씨. 한국 고전무용의 「스타」 姜여사는 그러나 죽을 때까지 자기의 예술 활동을 끝내지 않으리라는 뜨거운 말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춤을 배우기 시작한 15세때부터 따지면 무용경력 30년. 그동안 무용 영화 『초혼(招魂)』(아시아영화제 작품상 수상), 무대 공연 작품 『산제(山祭)』『장희빈』(태평무(太平舞)·서울시 문화상 수상) 『모란의 정(情)』을 비롯, 국내의 공연 50여회를 「마크」한 姜여사는 인간 문화재 한영숙(韓英淑)여사와 함께 우리의 전통적인 고전무용의 두드러진 계승자.
한영숙씨의 아버지 되는 故 한성준(韓成俊)씨에게 한영숙씨와 함께 사사한 전통 무용의 계승, 보존, 발전의 주역이다.
『저는 우리 고전무용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과 의견을 달리 합니다. 우리 무용은 오히려 박력 있고 선이 굵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움직여야 하는 거니까 현대의 「댄스」를 능가하는 거예요. 태평무 같은 건 너무 빨라서 발이 땅에 안 붙어요』
발이 바닥에 붙을 사이가 없을만큼 운동량(運動量)이나 속도가 현대의 춤을 능가한다는 이야기. 물론 표현 방법이 서양보다 유장한 것은 사실이다.
『고된 공연 연습이 마음대로 안되고 의상, 장치, 음악 등 전부 신경을 쓰다보면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특히 외국에 나가서 우리 국기를 걸어 놓고 우리 무용을 추어서 박수 받으면 참 흐믓해요. 남이 자기의 예술을 알아주는데 보람이 있는 거니까요』
강선영(姜善泳)씨가 무용에 소질이 뛰어나다고 인정 받은 것은 안성(安城)고등보통학교 다닐 때. 학예회에서 춤 추는 모양을 서울에서 온 무용 선생님이 주목, 계속 무용지도를 했다.
서울에 있는 한성준음악·무용연구소 연구생이 된 때가 16세. 10년동안 배우면서 제1회 무용 발표회를 부민관(지금 국회 건물)에서 가졌다.
일제말 일본 「다까라즈까」(예술촌)에 교환교수로 갔다가 폭격이 심해서 귀국, 해방 이듬해 결혼, 7년 전에 부군을 사별(死別)한 뒤 지금까지 줄곧 혼자서 무용만을 해왔다.
1960년에는 민속예술단의 일원으로 「유럽」, 동남아, 일본 등지를 순회 공연, 예술 한국을 펼치기도.
62년에는 일본 「오사까」 무용 연구소를 차리고 교포2세들에게 한국 춤을 가르치기 시작, 큰 성과를 거뒀는데 지금은 연구소를 「도꾜」로 옮겨 일본인들도 많이 가르치고 있다.
『지금 1년에 7~8개월은 한국에 있고 나머지 기간 동안은 일본에 가서 가르치고 있어요』
우리 무용에 있어서 12박자라든가 10박자 같은 형식은 강선영씨밖에 출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게 무용계의 평이다.
『글쎄요, 제가 길러낸 문하생이 아마 수천명은 되지요. 지금은 무용을 버린 사람들을 포함해서요. 이현자(李賢子), 구자운(具滋雲) 같은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현재 강선영 무용연구소의 연구생은 50명. 9·28 수복후 서울 을지로 입구에서 시작한 연구소가 지금은 동대문 상가 「아파트」로 옮겨 있다.
『제 생활은 예술을 따라가는 생활이에요. 나이를 먹었으니까 그만 하지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나도 남에게 할수 있지만 무대에서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해야죠. 「파리」에서 50세 된 노(老) 「발레리너」가 춤추는 걸 봤는데, 살이 없어서 팔가죽이 흔들흔들해요. 그러나 무용은 육체의 노소(老少)를 떠나 선이에요. 그 유명한 老무용수가 삐딱 넘어졌는데, 우뢰 같은 박수…저는 무대에서 죽어도 좋겠어요 』
취미는「골프」와 「볼링」.
[선데이서울 69년 11/23 제2권 47호 통권 제 61호]
무용가 강선영씨
한영숙씨의 아버지 되는 故 한성준(韓成俊)씨에게 한영숙씨와 함께 사사한 전통 무용의 계승, 보존, 발전의 주역이다.
『저는 우리 고전무용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과 의견을 달리 합니다. 우리 무용은 오히려 박력 있고 선이 굵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움직여야 하는 거니까 현대의 「댄스」를 능가하는 거예요. 태평무 같은 건 너무 빨라서 발이 땅에 안 붙어요』
발이 바닥에 붙을 사이가 없을만큼 운동량(運動量)이나 속도가 현대의 춤을 능가한다는 이야기. 물론 표현 방법이 서양보다 유장한 것은 사실이다.
『고된 공연 연습이 마음대로 안되고 의상, 장치, 음악 등 전부 신경을 쓰다보면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특히 외국에 나가서 우리 국기를 걸어 놓고 우리 무용을 추어서 박수 받으면 참 흐믓해요. 남이 자기의 예술을 알아주는데 보람이 있는 거니까요』
강선영(姜善泳)씨가 무용에 소질이 뛰어나다고 인정 받은 것은 안성(安城)고등보통학교 다닐 때. 학예회에서 춤 추는 모양을 서울에서 온 무용 선생님이 주목, 계속 무용지도를 했다.
서울에 있는 한성준음악·무용연구소 연구생이 된 때가 16세. 10년동안 배우면서 제1회 무용 발표회를 부민관(지금 국회 건물)에서 가졌다.
일제말 일본 「다까라즈까」(예술촌)에 교환교수로 갔다가 폭격이 심해서 귀국, 해방 이듬해 결혼, 7년 전에 부군을 사별(死別)한 뒤 지금까지 줄곧 혼자서 무용만을 해왔다.
1960년에는 민속예술단의 일원으로 「유럽」, 동남아, 일본 등지를 순회 공연, 예술 한국을 펼치기도.
62년에는 일본 「오사까」 무용 연구소를 차리고 교포2세들에게 한국 춤을 가르치기 시작, 큰 성과를 거뒀는데 지금은 연구소를 「도꾜」로 옮겨 일본인들도 많이 가르치고 있다.
『지금 1년에 7~8개월은 한국에 있고 나머지 기간 동안은 일본에 가서 가르치고 있어요』
우리 무용에 있어서 12박자라든가 10박자 같은 형식은 강선영씨밖에 출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게 무용계의 평이다.
『글쎄요, 제가 길러낸 문하생이 아마 수천명은 되지요. 지금은 무용을 버린 사람들을 포함해서요. 이현자(李賢子), 구자운(具滋雲) 같은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현재 강선영 무용연구소의 연구생은 50명. 9·28 수복후 서울 을지로 입구에서 시작한 연구소가 지금은 동대문 상가 「아파트」로 옮겨 있다.
『제 생활은 예술을 따라가는 생활이에요. 나이를 먹었으니까 그만 하지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나도 남에게 할수 있지만 무대에서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해야죠. 「파리」에서 50세 된 노(老) 「발레리너」가 춤추는 걸 봤는데, 살이 없어서 팔가죽이 흔들흔들해요. 그러나 무용은 육체의 노소(老少)를 떠나 선이에요. 그 유명한 老무용수가 삐딱 넘어졌는데, 우뢰 같은 박수…저는 무대에서 죽어도 좋겠어요 』
취미는「골프」와 「볼링」.
[선데이서울 69년 11/23 제2권 47호 통권 제 6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