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안팎에서 모두 치열했던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인생

링 안팎에서 모두 치열했던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인생

이슬기 기자
입력 2016-06-04 15:59
수정 2016-06-04 17:03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이미지 확대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한 무하마드 알리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한 무하마드 알리 미국의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왼쪽)가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취재진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알리는 1967년 베트남전을 반대하며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해 헤비급 타이틀과 프로복서 라이센스도 박탈당해 3년간 링에 오르지 못했다.
AP 연합뉴스
무하마드 알리는 그가 남긴 명언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처럼 화려했지만 굴곡진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링 위에서는 세계 챔피언을 석권하며 복싱계를 호령했고, 링 밖에서는 인종차별과 전쟁 반대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며 조명을 받았다.

1942년 1월 17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였다.

알리가 살던 곳은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더 많은 무시를 당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2세 때 우연처럼 복싱에 입문했다.

자전거 분실 신고를 하며 분을 이기지 못했던 알리에게 한 형사가 “복싱을 배워봐라”라고 농담을 던진 것이 계기였다.

알리는 당시 세계 헤비급 챔피언 로키 마르시아노의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으며 본격적으로 복싱에 투신했다.

알리는 18세였던 1960년 아마추어 복서로서 로마올림픽 라이트헤비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그는 고향인 켄터키 주 루이빌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지만, 여전히 극심한 인종차별을 받았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사려다 거절당했고, 백인 갱들로부터 위협까지 받았다.

환멸을 느낀 알리는 금메달을 오하이오 강물에 던져 버린 뒤 곧바로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알리는 훗날 “미국을 대표해 금메달을 따냈다고 생각했던 환상이 그때 사라졌다”라고 말했다.

현란한 스텝과 반사신경, 정확한 펀치로 무장한 알리는 프로 무대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1964년 2월 25일 복싱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알리는 당시 챔피언 소니 리스턴을 상대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겠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링 위에 올라섰고, 7라운드 TKO승을 거두며 WBA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곧바로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그는 한창 인기를 구사하던 당시, 본격적으로 삶의 철학을 인생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개명했다.

알리는 당시 개명 사실을 알리며 “나는 백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이 없고, 백인과 결혼할 생각도 없다. 난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알리는 링 안에서는 화려한 복싱으로 팬들을 열광케 했고, 링 밖에서는 거침없는 독설과 사회활동으로 언론에 본인의 이름을 도배했다.

그러나 알리는 1967년 본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당시 베트남전에 반대해 징병을 거부했다가 챔피언 자리와 프로복서 자격을 박탈당해 3년 5개월간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알리는 당시 법정에서 “난 흑인이라는 이유로 이 나라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남의 자유를 위해 싸울 순 없다”고 외쳤다.

우여곡절 끝에 무죄 판결을 받고 3년 만에 링에 돌아왔지만, 알리는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전성기가 지난 32세의 알리는 주특기였던 스텝이 느려지면서 움직임이 둔해졌다.

결국 그는 반사신경만으로 상대 공격을 피하던 노 가드 전술을 버리게 됐다

알리는 당시 세계 헤비급 1위 제리 쿼리와 3년 만에 경기를 치러 3회 TKO승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했지만 1971년 조 프레이저에게 생애 첫 패배를 기록했다.

그러나 알리는 1974년 자이르 (콩고민주공화국의 옛 국명) 킨샤사에서 무적의 챔피언 조지 포먼을 8회 KO로 누르고 세계챔피언에 복귀했고, 1975년 10월 타이틀 방어전에서 조 프레이저에게 14회 TKO승을 거두고 설욕에 성공했다.

그의 기량은 1978년 2월 레온 스핑크스에게 패하면서 저물기 시작했다.

그는 39세였던 1981년 트레버 버빅과 논타이틀 경기에서 판정패한 것을 마지막으로 통산전적 56승(37KO)5패를 남기고 21년 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자유와 정의, 평등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선수 이후의 삶은 안타까웠다.

은퇴 후 선수 시절 얻어맞아 생긴 충격으로 파킨슨병에 걸려 불우한 노후를 보냈다.

그는 54세였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로 나와 오른손을 떨면서 성화대에 점화해 많은 사람에게 회자됐다.

그는 남자 농구 결승전 하프타임 때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으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지난 1960년 인종차별에 항거하며 강물에 던져버렸던 금메달을 36년 만에 다시 받은 것이다.

이후 알리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올스타전(2003년)에 시구자로 나섰고 2005년 미국 백악관에서 자유훈장을 받는 등 대중 앞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2012년 런던올림픽 개회식에도 등장해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그는 2016년 6월 4일 파킨슨병의 합병증인 호흡기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