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창고’는 119년 역사의 서울신문 DB사진들을 꺼내어 현재의 시대상과 견주어보는 멀티미디어부 데스크의 연재물입니다.
사진창고
서울대 합격이다
1991년 대학입시풍속도- 서울대 합격자 발표날 서울대 운동장 합격게시판에서 합격을 확인한 한 학생을 지인들이 축하해주고 있다. 1991.12.30 서울신문 사진창고
닫힌 문 뚫고 원서접수
1986년 대입원서 마감일인 1월 9일 서울 연세대에서 한 수험생의 학부모가 마감시한을 넘긴 시간에 원서접수를 하기 위해 굳게 닫힌 출입문의 깨진 유리창 틈으로 들어가고 있다. 손에 들린 명품가방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1986.1.9 서울신문 사진창고
긴장감으로 만들어진 ‘수능한파’
‘수능한파’라는 말은 수능이 실시되는 날의 기온이 대부분 평상시보다 낮아서 생겨난 말이지만 대입(大入)을 위해 결전을 치르는 입시생들이 느끼는 높은 긴장감으로 더욱 그날이 춥게 느껴져서 생겨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능은 1993년 8월 처음 시행돼서 올해로 30년이 된 대학교육에 필요한 수학(修學)능력을 평가하는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이다. 이 수능을 즈음해 우리나라의 대학입시시험의 역사를 서울신문 사진창고에 있는 사진들과 함께 돌아본다.
선배님들 화이팅
수능일인 14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에서 고등학생 후배들이 선배 수험생을 응원하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2019.11.14 서울신문 사진창고
후배들의 알통응원
1996년 대입 본고사가 치러진 서울 고려대에서 양천고 재학생들이 선배들의 선전을 기원하며 알통으로 응원하고 있다. 1996.1.8 서울신문 사진창고
예비고사 시절 시험장
1972년 11월 27일 서울 숙명여고에서 수험생들이 예비고사를 보고 있다. 1972. 11. 27 서울신문 사진창고
학교별로 입시 채점
KIST에서 학교 교직원들이 대입 예비고사를 채점하고 있다. 1971.12. 1 서울신문 사진창고
과반수가 20점도 못 받는 극강의 난이도
본격적인 대학입시시험은 해방이후인 1946년부터 ‘대학별고사’라는 이름으로 시행됐다. 국가 주도가 아닌 각 대학에서 자체적으로 출제한 시험문제(본고사)에 논술이나 면접을 추가한 시험이었다. 이 중에서 국영수(국어, 영어, 수학) 과목에 해당하는 주관식 서술형 위주의 필기시험인 본고사가 대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시험이었다. 대학별로 차이는 있었지만 당시 본고사는 2~3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난이도가 아주 높은 10문제 이내의 문제를 푸는 방식이었다. 극강의 난이도를 자랑했던 본고사의 한 예시로 1953년 연희대학(現연세대학교) 대학별고사에 응시한 과반수의 학생이 20점 미만의 점수를 받았다는 자료도 있다. 이 때문에 본고사에 특화된 고가의 사교육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별고사의 또 다른 문제점은 ‘입시비리’였다. 채점권한이 대학에 있다보니 대학은 이를 악용한 비리들을 저질렀다. 이런 문제점들로 인해 국가는 국가주도의 대학입시시험을 시행하게 됐다.
본고사 예상문제집 구매
1987년 대입 논술고사를 앞두고 서울 한양대에서 수험생 학부모들이 예상 문제집을 구입하고 있다.1987.1.6 서울신문 사진창고
면접보고 있는 수험생들
1992년 서울 이화여대에서 입시생들이 입학을 위한 최종 면접시험을 치르고 있다. 1992.12.23 서울신문 사진창고
군사정권에 이루어진 강력한 7.3 교육개혁
1969년 시행된 ‘예비고사’는 국가가 주관한 첫 대입시험이었다. 대입시험의 주도권이 국가로 넘어가자 대학들은 자율권을 침해받았다며 강력히 항의했고 결국 그 타협안으로 정부가 출제한 예비고사의 성적순으로 1.5배의 모집인원을 선발하면 대학이 최종인원을 선발하는 방식이 채택됐다. 하지만 대학별고사를 위한 ‘사교육’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1980년 ‘과외전면금지’조치를 실시하고 대학별시험 폐지를 단행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성적인 내신을 대입점수에 합산하게 했다. 12.12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강력한 조치가 가능했다. 7. 30 교육개혁으로 불리는 이 조치는 대학입학시스템을 완전히 뒤흔들어 버릴 정도로 파격적이었지만 당시 상당수의 국민들은 오히려 이를 반겼다. 이는 그 당시 사교육과 입시비리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TV로 중계되는 과별 경쟁률
1996년 대입 원서마감 풍속도.- 중앙대 본관 앞에 마련된 폐쇄회로 tv 모니터를 통해 지원현황을 바라보고 있는 지원자와 가족들 1996.1.6 서울신문 사진창고
공중전화로 원서 눈치작전
1987년 대입 원서마감 풍속도- 다른 학교에 가 있는 사람들과 전화로 지원 경쟁률을 비교해보기 위해 공중전화부스에서 통화하고 있다. 1987.1.8 서울신문 사진창고
경쟁률 중계 라디오 방송 들으며 눈치작전
1985년 대입 원서마감 풍속도-라디오로 중계되는 대학별 최종 지원경쟁률을 들으며 막판 눈치작전을 하는 수험생들 1985.1.14 서울신문 사진창고
미국의 SAT 모델삼아 수학능력시험 연구
1983년 예비고사는 ‘학력고사’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됐다. 이 학력고사는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과목을 측정하는 시험으로 필기시험 320점에 체력을 평가하는 체력장 점수 20점를 더해 340점 만점으로 구성됐다. 인문계와 자연계의 과목과 문제가 다른 것은 지금과 같았지만 실업과목(농업, 공업, 상업, 가사 등)이 있어서 남학생과 여학생의 응시과목도 달랐다. 1985년까지는 지금처럼 영어가 필수과목이 아닌 외국어 선택과목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영어에 부담을 느낀 입시생들은 점수획득이 상대적으로 쉬운 일어, 독어, 불어 등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 당시는 전형과정도 지금과는 달리 전기와 후기로 나눠서 한 대학씩만 지원이 가능했다. 그리고 대학을 먼저 지원하고 시험을 보는 ‘선 지원 후 시험’의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원서접수 마감 일이면 방송사들이 각 학과 별 지원현황과 경쟁률을 보도하는 특집방송을 편성하기도 했다. 사교육 방지와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조치로 시행됐던 ‘학력고사’도 점차 그 문제점이 드러났다. 고교 전과목별로 문제가 출제되었고 대부분의 문제들이 과도한 암기형 문항들로 이루어진 객관식 문제여서 수험생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었고 고등학교의 학업성취도 검사에 지날 뿐 대학교육을 받을 능력을 측정할 수 없다는 평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미국의 SAT(Scholastic Aptitude Test)를 모델로 삼아 대학입학 적성검사의 연구를 진행했고 7차례에 걸친 실험평가를 통해 1993년에 지금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시행하면서 ‘학력고사’ 폐지를 선언했다.
아버지 정답을 알려줘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14일 서울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앞에서 학생들이 수험생을 응원하고 있다. 2019.11.14 서울신문 사진창고
뜨거운 응원열기
전기대 입시가 치러진 1990년 12월 19일 연세대 정문에서 동문들이 수험생들을 응원하고 있다.1990.12.19 서울신문 사진창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시행하게 된 ‘수능’은 올해로 30돌을 맞이하게 됐다. 완벽한 시험방식은 없듯이 수능 또한 시행 초기부터 지금까지 여러 논란 속에서 계속 진화하고 있다. 수능시행 첫해인 1993년에는 8월과 11월 두 번의 시험이 시행됐다. 수험생들에게는 가혹했던 이 두 번의 시험방식은 2차 시험의 참여율이 저조하고 두 시험간의 난이도차가 심해 이듬해인 1994년부터는 11월 한 번만 시행하게 됐다. 그리고 1995년 11월 시험까지 200점 만점이었던 수능은 1996년도부터 400점 만점으로 바뀌었다. 당해의 수능은 역대 최고의 ‘불수능’으로 기록됐다. 320점 이상만 돼도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 대부분의 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으니 96년도 수능난이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후 매년마다 난이도의 조정이 이루어지고 등급제의 도입 등 크고 작은 변화들은 있었지만 30년이 지나도록 ‘수능’은 대한민국의 가장 오래된 대입시험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라이터로 녹이는 엿
1986년 대입 풍속도. 대입시험이 치러지는 서울 동성중학교 교문에 합격 기원 엿을 붙이기 위해 한 학부모가 라이터로 엿을 녹이고 있다. 1986.11.21 서울신문 사진창고
미성년자에게 주는 합격 막걸리
1986년 대학입시풍속도- 서울 고려대에서 합격자 발표가 있던 1월 20일 한 합격자가 재학생들이 준비한 막거리를 마시며 합격을 자축하고 있다.
1986.1.20 서울신문 사진창고
1986.1.20 서울신문 사진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