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 ‘분노의 연대’ 촉발한 강남역 ‘묻지마 살인’

여성들 ‘분노의 연대’ 촉발한 강남역 ‘묻지마 살인’

입력 2016-12-12 06:47
수정 2016-12-12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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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丙申年)에 ‘병신’ 같은 여자 두 명 때문에 이게 무슨 꼴입니까?” “발언자분. 장애인이나 여성을 차별하는 표현은 자제해 주세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사상 최대 규모 집회가 열린 이달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자유발언대에 선 한 중년 남성이 거친 표현을 사용하자 사회자가 즉각 제지했다. 과거 집회에서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집회 전날인 2일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200일이 되는 날이었다. 올해 5월 17일 새벽, 23세 여성 A씨는 서울 강남역 인근 주점 공용화장실에서 조현병(정신분열증) 환자 김모(34)씨가 휘두른 흉기에 살해당했다.

여성운동 연구자들은 올해를 대표하는 사건 중 하나로 이 사건을 빼놓지 않는다. 학자들은 “강남역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사회도 본격적으로 여성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다”고 평가한다.

◇ “나는 살아남았다” 분노한 여성들 거리로…한국판 ‘두 번째 물결’

수사기관은 이 사건이 여성이라는 특정 대상을 향한 혐오범죄(hate crime)가 아니라 정신질환에 따른 ‘묻지마 범죄’라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범인이 “여성에게 자꾸 무시를 당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여성은 이번 사건의 기저에서 여성혐오(misogyny)를 읽었다.

누구나 한 번쯤 들렀을 법한 유명 번화가 한복판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초년생 여성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많은 여성은 ‘내가 피해자가 됐을 수도 있었다’는 공포와 분노로 강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거리로 몰려나온 여성들의 외침은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였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피해자 추모 문구를 적은 접착식 메모지(포스트잇)가 일주일 만에 2만개 이상 붙었다. 이화여대, 서울시청에 이어 대전, 대구, 부산 등 전국 각지에도 포스트잇 추모 움직임이 일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서구의 ‘두 번째 물결’(second wave, 1960년대 나타난 급진적 페미니즘 운동)과 같은 경험을 우리 사회가 하는 것”이라며 “계급이나 구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처럼,젠더 차별 문제를 해소하려는 행동도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 ‘분노의 연대’가 남긴 것은 ‘용기’…잇따른 여혐 고발

수사가 끝나고 범인은 재판에 넘겨졌지만, 여성운동은 시작이었다. 여성의 부당한 피해를 고발하는사건이 하반기 내내 이어졌다.

게임 ‘클로저스’ 성우가 여성주의 사이트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었다가 남성들로부터 비판 포화를 맞고 교체되자 “정치적 의견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직업상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반발이터져 나온 것이 대표 사례다.

가요계는 방탄소년단부터 DJ DOC·산이까지 하반기 내내 ‘여혐’ 가사 논란으로 들끓었다. 박범신 작가·박진성 시인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로부터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당했다는 여성 문학인들의 폭로가 줄을 잇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이 그간 감춰 왔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은다. 피해자를 추모하며 분노로 연대하는 경험을 한 여성 개개인이 과거와 비할 수 없을 만큼 큰 용기를 얻었다는 분석이다.

윤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강남역 사건은 여성 스스로가 하나의 사건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개념어를 붙이고, 추가로 문제 제기까지 한 첫 사례”라고 규정했다.

윤 교수는 “과거에는 어떤 사건이 터지면 언론·학자 등 전문가 집단이 개념어를 붙이고 진단했는데, 이제는 여성단체도 아닌 불특정 다수 여성 대중이 자발적으로 어떤 사안을 건져 올린 다음 논쟁 지점으로 내던져 사회적 합의와 조율까지 끌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 남녀 갈등 여전…전문가들 “남자들이 양보하고 귀 기울여야”

최근의 ‘여혐’ 이슈에는 항상 반대 목소리가 뒤따른다.

주로 여성 네티즌들이 특정 이슈를 꺼내 들면서 “여성혐오”라고 지적하면, 남성 네티즌들이 “별걸 다 불편해한다. ‘프로불편러’들 때문에 너무 피곤하다”며 공감하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여 갈등 구도가 형성됐다.

최근 DJ DOC의 대통령 풍자 노래 가사 속 ‘미스 박’이라는 표현이 ‘여혐’인지 아닌지를 놓고 남녀 네티즌 간 설전이 벌어진 일이 대표적이다.

자칭 여성우월주의 단체 ‘워마드’ 등 일부 여성 네티즌이 온·오프라인에서 ‘한국 남자’ 전체를 맹목적으로 혐오하는 극단적 행태를 보여 여성운동 전체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수백년 넘게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남성우월주의와 성차별, 성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이제야 싹을 틔운 만큼, 기득권을 보유한 남성이 조금 더 양보하면서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윤지영 교수는 “여성들이 별것 아닌 일에 비명을 지른다고 생각하는 남성은 그간 일상 속의 차별과 혐오 언어에 관통당한 적이 없어서 둔감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라며 “둔감함도 강자의 권력이자 특혜”라고 지적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전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시선에서 여성 이슈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면서 “남성이 아니라 여성들이 ‘이 정도면 남녀가 대등하다’고 인정하고 수용할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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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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