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만득이’ 실종 19년…지적장애 모친·누나도 고통의 세월

가장 ‘만득이’ 실종 19년…지적장애 모친·누나도 고통의 세월

입력 2016-07-16 10:42
수정 2016-07-16 11:08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아버지 일찍 여읜 뒤 축사서 일 배워 가장 노릇하던 만득이 홀연히 사라져

이미지 확대
‘축사노예’ 19년 만에 어머니 만난 지적장애인 고모씨
‘축사노예’ 19년 만에 어머니 만난 지적장애인 고모씨 19년간 남의 축사에서 노예처럼 일하며 살아온 지적장애인 고모(47)씨가 20여년만인 지난 14일 청주 오송에 사는 어머니를 만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들 실종에 모녀 곤궁한 생활…기초생활수급비 끊겨 주변 도움받아 지탱

집을 떠나 19년간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일면식도 없는 남의 축사에서 강제노역을 해온 지적 장애인 고모(47)씨.

자신을 포함해 부모와 누나 등 일가족이 모두 지적 장애로 힘겹게 살아오던 터에 가족이 생이별까지 했던 슬픈 가족사가 알려지면서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고씨가 영문도 모른 채 김모(68)씨의 축사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는 동안 가족의 삶 역시 험난한 고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뜬 뒤 집안에서 유일한 남자로 가장 노릇을 하던 그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지적 장애인 모친과 누나는 졸지에 기대고 의지할 곳을 잃게 됐다.

지적 장애 2급의 고씨는 1997년 여름 소 중개업자의 손에 이끌려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김씨의 축사에 왔다.

축사 주인 김씨 부부는 고씨를 6.6㎡ 크기의 허름한 쪽방에 지내게 하며 2만㎡ 규모의 축사에서 젖소와 한우 44마리를 키우는 일을 시켰다.

이곳에서 고씨는 자신의 이름조차 잊은 채 ‘만득이’로 불리며 하루하루 힘든 노동에 시달렸다. 소에게 먹이를 주는 것은 물론 악취가 진동하는 분변까지 치우는 중노동이었지만 임금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끼니나 제때 챙겨주면 다행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끼니를 굶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몸 곳곳에 상처가 있었던 점으로 미뤄 학대 가능성도 제기됐다. 고씨도 경찰 조사에서 “주인에게 맞았다”고 진술했다.

고씨는 그렇게 자신이 왜 김씨의 집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19년간 강제노역을 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원래 고씨는 오창읍과 멀지 않은 흥덕구 오송읍에서 살았다.

그와 함께 살던 어머니(77)와 누나(51)도 지적 장애 2급이다. 고씨가 어렸을 때 지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역시 지적 능력이 일반인에 비해 다소 떨어졌다고 동네 사람들은 기억했다.

일반 가정과는 조금 달랐지만 누구보다 성실한 아버지가 있었기에 고씨 가족은 작은 움막집에서 텃밭을 일구며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지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남겨진 세 식구의 힘겨운 생활이 시작됐다. 매달 나오는 50만∼60만원의 기초생활수급비가 생활비의 전부였다.

비록 가난했지만 서로를 믿고 기댈 수 있는 가족이 있었기에 세 식구는 행복했다.

성년이 된 고씨는 실종되기 전 2∼3년간 지인이 소개해 준 충남 천안의 한 축사에서 일을 배웠다. 그곳에서 숙식하며 번 돈은 가족이 생활하는데 큰 보탬이 됐다. 아버지를 대신해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

명절 때는 오송 집으로 와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가끔 천안 축사로 어머니가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 1997년 여름 고씨가 갑자기 사라졌다.

당시 천안 축사 관계자는 경찰에 고씨가 사라진 사실을 알렸지만 그의 행적은 묘연했다. 고씨 어머니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사라진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 아들의 실종은 어머니에게 크나큰 상처가 됐다. 그렇게 칠순을 넘긴 노모의 가슴에 고씨의 실종은 응어리가 됐고, 한이 됐다.

지적 장애라 표현은 못했을 뿐 믿음직한 아들을 잃은 어미의 아픔은 일반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행방불명된 지 19년이 됐지만 여태껏 주민등록 말소도, 사망신고도 하지 않고 호적을 지켜낸 것은 어디에서든 살아만 있으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고씨가 사라진 뒤 어머니와 누나는 기초생활수급비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지만 얼마 뒤 위기를 맞았다.

2008년 무렵 주 생계 수단인 기초생활수급비가 끊겼다.

오송 지역 개발로 아버지가 남긴 텃밭 땅값이 치솟자, 이게 소득으로 잡히면서 수급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별 볼 일 없던 땅의 가치가 올라갔으니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당장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이들 모녀는 눈앞이 캄캄했다. 일반인이라면 땅을 팔았겠지만 두 모녀는 불행히도 그런 판단을 할 능력이 못됐다.

딱히 경제 활동을 할 처지도 못 돼 고씨 어머니의 노령연금 20만원과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버텼다.

곤궁했던 생활을 하던 모녀는 3년 전쯤 친척의 도움을 받아 겨우 땅을 팔았다.

이 돈으로 생활이 안정되자 고씨 어머니는 사라진 아들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어머니는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놓지 않았다.

그런 고씨 어머니 앞에 지난 14일 밤 금쪽같은 아들이 돌아왔다.

고씨에게 강제노역을 시킨 김씨 부부에 대한 경찰 조사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19년 만에 꿈 같은 가족 상봉이 이뤄진 것이다.

간절하게 아들의 귀향을 갈구했던 어머니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 많이 찾아다녔다”며 고씨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19년간 누구보다 힘들었을 고씨도 감정 표현은 서툴렀지만 “나도 알아, 알아”라고 말하며 꿈에 그리던 어머니와의 재회를 반겼다.

죽은 줄 알았던 고씨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온 마을이 잔칫집 분위기다.

마을 주민 이모(72·여)씨는 “찾는 걸 사실상 포기했던 고씨가 돌아와 깜짝 놀랐다”며 “얼굴만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그동안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고 안타까워했다.

고씨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행정기관도 이들 돕기에 나섰다.

청주시 관계자는 “고씨 어머니 소유 재산이 생계급여 기준을 초과해 기초생활수급비 지급이 어렵지만 경제 활동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토지 매매에 따른 일시적 소득인 점을 고려해 특례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경찰은 고씨에게 19년간 무임금 강제노역을 시킨 김씨 부부를 근로기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조사하고 있다.

경찰은 고씨가 김씨의 축사로 오게 된 경위와 강제노역을 시키는 과정에서 가혹 행위는 없었는지 등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연합뉴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