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자가 수사 사안 심사할 의무 없어…권한남용 통제는 국가·수사기관 몫”
수사기관의 요청으로 영장 없이 개인정보를 넘겨준 인터넷 포털업체가 회원에게 배상할 책임은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10일 차모(36)씨가 네이버를 운영하는 주식회사 NHN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개인정보 제공으로 인한 위자료 5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개인정보 제공 요청을 받은 네이버가 사안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 제공 여부를 심사할 의무는 없다고 판단했다. 앞서 2심은 네이버가 전기통신기본법에 규정된 통신비밀 보호 전담기구를 통해 개인정보를 제공할지, 어느 범위까지 할지 결정했어야 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의 권한 남용 통제는 국가나 해당 수사기관에 대해 직접 이뤄져야 한다”며 “전기통신사업자의 심사 의무를 인정해 그 제공으로 인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국가나 해당 수사기관의 책임을 사인에게 전가시키는 것과 다름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오히려 전기통신사업자가 개별 사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실질적으로 심사할 경우 혐의사실 누설이나 별도의 사생활 침해 등을 야기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통신내역이나 감청과 달리 인적사항 정보는 법원의 영장 없이 서면요청만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한 전기통신기본법의 입법취지를 감안하면 포털업체에 심사 의무를 지우기 어렵다고도 했다.
재판부는 “통신자료가 주로 수사 초기 신속하게 확인해야 할 정보에 해당해 개인정보 제공으로 얻을 공익은 큰 반면 제한되는 사익은 인적사항에 한정된다”고 덧붙였다.
차씨는 2010년 3월 당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씨를 포옹하려다 거부당한 것처럼 보이게 한 이른바 ‘회피 연아’ 동영상을 네이버 카페에 올렸다.
유씨는 동영상을 올린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종로경찰서는 네이버에 통신자료 제공요청서를 보내 차씨의 이름과 네이버 ID, 주민등록번호, 이메일 주소, 휴대전화 번호, 네이버 가입일자 등의 자료를 넘겨받았다.
전기통신사업법은 ‘전기통신사업자가 수사나 형 집행 등을 위한 자료 열람·제출을 요청받으면 응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차씨는 “자료제공 요청에 응할 의무가 없고 개인정보보호 의무를 규정한 네이버 서비스 이용약관을 어겼다”며 NHN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앞서 2심은 NHN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깨고 개인정보가 영장에 의해 제공되는 게 원칙이라며 포털업체의 손해배상 의무를 인정했다.
2심은 “네이버가 보유한 차씨의 개인정보에도 영장주의 원칙이 배제될 수 없다”며 “개인정보를 급박하게 제공해야 할 특별한 사정은 없어보이고 차씨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내지 익명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2012년 10월 2심 판결 이후 포털업체들은 영장제시 없는 개인정보 제공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동통신 3사는 개인정보 제공요청에 계속 응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에 따르면 수사기관이 영장 없이 제출받은 통신자료는 2012년 787만여건, 2013년 957만여건, 2014년 1천296만여건으로 해마다 증가 추세다.
참여연대는 논평에서 “대법원이 헌법상 영장주의 원칙을 후퇴시키고 테러방지법에 날개를 달아줬다”고 비판했다.
이어 “대법원 판결은 전기통신사업자들이 영장제시 없는 수사기관의 신상정보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선언은 아니다. 통신비밀의 자유와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통신자료 임의제공을 중단한 게 앞으로도 유지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