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블로그] 역풍 일으킨 과도한 국정화 홍보

[현장 블로그] 역풍 일으킨 과도한 국정화 홍보

이성원 기자
입력 2015-11-11 23:02
수정 2015-11-11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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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오전 11시쯤 국립중앙박물관 페이스북에 포스터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위한 교과서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한국사 국정화 홍보 포스터였습니다.

지난 3일 있었던 황교안 국무총리의 국정화 관련 대국민 담화 영상도 함께 올라왔습니다. 보통 박물관 알림이나 이벤트, 소장품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됐던 페이지였던 만큼 이 글들은 유독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랑말랑한 동화책 사이에 대학 전공서적 한 권이 껴 있는 느낌이랄까요. 뭔가 어색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게시글엔 적지 않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 사랑 박물관이 이럴 줄은 몰랐다. 진짜 실망이다”라고 적었고, 어떤 사람은 “박물관마저 이러면 안 되지”라고 썼습니다. “외국인들도 볼 수 있는 박물관 (페이스북) 계정까지 국정화 홍보에 동원되는 게 부끄럽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논란이 커지자 게시글들은 그날 오후 4시쯤 사라졌습니다. 박물관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관리자가 글을 지우진 않았지만, 타임라인에서 안 보이게끔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취재를 해보니 속사정이 있었습니다. 박물관의 상위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달 말 협조 요청 메일을 보냈던 것입니다. 박물관이 운영하는 SNS에 국정화 홍보 글을 올려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문체부는 국립중앙박물관뿐 아니라 문화재청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도 이런 협조 요청 메일을 보냈습니다. 교육부의 요청을 줄줄이 소속 기관들에 전달한 셈입니다.

정부는 추진하고 있는 정책을 홍보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지나치면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 같습니다.

행정자치부가 국정화 관련 내용을 반상회에서 홍보하도록 전국 17개 시도에 협조 공문을 보내 빈축을 산 게 대표적입니다. 박물관도 협조 메일이 왔을 때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한 관계자는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박물관은 국정 홍보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상급 기관 지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홍보에 동참한 거예요. 이번 조치로 우리 박물관 페이스북의 팔로워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등 역효과만 나고 말았습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2015-11-12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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