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공동목적·통솔체계 갖춘 지속적 결합체’가 기존 판례경찰 “선례 없지만 범죄단체 요건 있어”…법조계는 ‘신중론’
검찰에 이어 경찰에서도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조직을 폭력조직과 같은 ‘범죄단체’로 간주한 첫 사례가 나왔다.법원에서 이를 인정한 확정판결이 내려지면 보이스피싱 사기를 억제하는데 효과가 크겠지만, 선례가 없고 범죄단체 인정 요건이 까다로워 법 적용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2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태국과 베트남에 근거를 둔 보이스피싱 조직원 41명을 붙잡아 조사하고서 이들 중 총책과 부사장 등 2명에게 사기 혐의와 더불어 ‘범죄단체 등의 조직’(형법 114조) 혐의를 적용했다.
사기죄의 징역형 최고 형량은 10년이지만, 범죄단체 조직죄와 묶여 경합하면 10년의 2분의 1인 5년까지 가중처벌할 수 있어 최고 형량이 15년으로 늘어난다. 범죄단체에 단순 가입·활동한 이들도 이 조항의 적용을 받는다.
문제는 보이스피싱 조직을 범죄단체로 인정한 판례가 없는 데다 기존의 폭력조직에조차 범죄단체 혐의 적용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경찰이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1985년 대법원의 어음사기 사건 판례다.
당시 대법원은 일부 피고인이 어음사기 범죄단체를 조직했다는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하면서 범죄단체를 ‘특정 다수인이 일정한 범죄를 수행한다는 공동목적 아래 이뤄진 계속적인 결합체로서 최소한의 통솔체계를 갖춘’ 집단으로 규정했다.
이 정의대로라면 ‘윗사람을 보면 90도로 인사한다’ 정도의 행동강령을 갖춘 이른바 ‘동네 조폭’도 범죄단체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웬만큼 ‘계보’를 그릴 수 있을 정도의 조직체계, 배신자 처벌 등 통솔체계가 명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번에 검거한 보이스피싱 조직이 대법원의 이같은 정의에 들어맞는 범죄단체로 볼 이유가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경찰은 일단 이들 조직이 처음부터 사기라는 특정 범죄를 목적으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범죄를 위한 ‘공동목적’이 분명하다고 봤다.
범죄단체로 인정된 기존 폭력조직도 애초 구성 단계에서 범죄 자체보다 ‘이권 획득’에 주된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면 보이스피싱 조직의 경우 오히려 그보다 공동목적은 명확하다는 설명이다.
범죄단체 인정의 주된 요건인 통솔체계와 내부 위계질서 유지 방안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경찰은 해석했다.
서대문서가 검거한 조직들은 큰 성과를 낸 조직원에게는 유흥주점에 데려가 비싼 술을 사주고 성매매를 시켜주거나 호화 요트관광을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격려했다.
반면 조직원들에게 가명을 쓰게 하고 조직원 간 접촉은 메신저로만 허용하며, 콜센터 밖으로 외출을 철저히 차단하는 등 엄격한 조직관리 체계를 뒀다. 조직 내에서는 사진도 일절 찍지 못하게 했다.
조직원 이탈을 막을 보복 위협도 존재했다.
폭력조직처럼 배신자의 손가락을 자르는 등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무단이탈 전력이 있는 조직원의 여권을 압수하거나 ‘국회의원과 공무원 쪽에 줄이 다 있으니 잡히면 24시간 안에 풀어줄 수 있다’, ‘나가서 불면 절대 가만두지 않고 죽여버리겠다’ 등의 경고가 팀원들에게 내려간 사실도 확인됐다.
총책-부사장-팀장-팀원으로 뚜렷한 조직체계를 갖춘 점, 2012년 중국에 꾸려진 조직이 이후 와해하고 베트남과 태국 조직 등으로 명맥을 이으면서 범죄단체로서 연속성을 띠는 점 등도 경찰이 내세운 근거다.
서대문서 관계자는 “통솔체계와 내부 위계질서 유지 방편, 조직원을 관리할 행동강령의 존재 여부 등이 관건”이라며 “선례가 없고 충분한 법률 검토가 필요하지만, 여러 요건을 고려할 때 범죄단체로 간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법조계는 신중한 반응을 내놓고 있다.
재경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일반론을 전제로 “보이스피싱뿐 아니라 기존 폭력조직도 범죄단체 적용이 법리적으로 쉽지 않다”며 “보이스피싱을 엄중히 처벌한다는 취지는 큰 틀에서 맞지만, 실제로 범죄단체로 인정되려면 매우 정교한 법리 검토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통솔체계의 존재가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느냐가 핵심”이라며 “단순히 사기범죄를 하려고 각자 어떤 역할을 맡는 수준이어서는 부족하고 특정 다수인의 지속적 결합, 위계와 역할의 존재, 내부 행동강령 등 여러 요건이 확인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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