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위한 불가피한 조치” vs “전형적인 탁상행정”
내년부터 학교를 방문하는 모든 외부인의 출입증 패용이 의무화되면서 학부모와 교육계, 지역 주민의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최근 교육과학기술부는 학교치안을 이유로 학교 출입증 및 출입에 관한 표준 지침 등을 포함한 ‘학생보호 및 학교안전 강화를 위한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내년 신학기부터 전국 초·중·고교에서 교직원은 교직원증을, 학생은 학생증을 달고 다녀야 하며 이를 제외한 외부인은 경비실이나 행정실에 방문 목적을 밝힌 뒤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증을 받아야 한다.
다만 체육관 등 학교시설을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지역주민과 학부모는 최장 3년간 유효한 일반 출입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
출입증이 없는 외부인은 바로 퇴교조치된다.
◇”안전 위한 불가피한 조치”…”보완장치 필요” = 학교 보안이 강화된다는 소식에 학부모들은 일단 반색하면서도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신원확인을 거치는 것이 번거로울 수는 있지만, 아이들의 안전을 담보하려면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초등학교 3학년생 딸을 둔 학부모 이정미(38·여·대구)씨는 “교사, 교직원, 학생이 아닌 외부인을 통제하는 조치는 당연한 것”이라며 “외부인이 학교에 갈 땐 행정실을 거쳐 출입증을 받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학부모 한모(43·여·충북)씨도 “한국에서는 외부인이 교실 복도까지 들어가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 신원조차 확인하지 않는다”며 “필리핀만 해도 정문에서 철저히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특히 아이들이 있는 교실에 접근하는 건 학부모에게도 절대 허용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부모가 마음을 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2학년 자녀를 둔 변모(40·여·대전)씨는 “학생들의 안전을 지킨다는 경비직원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자행하는 마당에 이런 게 효과가 있을지 의심된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중학교 2학년 딸과 초교 5학년 딸을 둔 학부모 이모(45·여·제주)씨는 “안전조치 강화는 반갑지만, 학교 개방화 사업으로 담장을 허무는 등 외부 경계가 사라진 상황에서는 경비 인력을 더 많이 동원하고 CCTV 설치를 확대해 실질적인 대책을 보완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일선 교사들과 시민단체들도 취지에 공감하지만, 보완 장치가 필요하다는 견해다.
금태림 울산 다운초등학교 교장은 “최근 남자 학부모의 학교 출입도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에 학부모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이 옳다”며 그러나 “외부인을 실제로 통제하려면 출입증만 있어서 될 것이 아니라 경비실이 설치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인애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 마산·창원·진해 지회장도 “초등학교의 경우 학부모가 준비물·숙제·우산 등을 갖다주러 학교에 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마다 일일이 출입증을 받아야 한다면 부담스러워할 수 있기 때문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신대휴 충북교총 사무처장도 “학내에서 각종 사건이 빈발하는 상황에서 교과부의 대책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면서도 “많은 학교가 주민들에게 휴식처를 주려고 담을 허물었는데 출입증 패용을 의무화할 때는 담을 다시 쌓아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담장 없애랄 땐 언제고’…”전형적 탁상행정” = 각 시·도 교육청은 일단 구체적인 지침이 내려올 때를 기다리면서도 예산이 큰 문제라고 우려했다.
부산의 경우 경비실 등을 갖춰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학교는 117곳에 불과하고 나머지 대다수 초·중·고교는 사실상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다.
정부 방침대로 출입증 패용을 의무화하고 경비실을 설치하려면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데 아직 정부 지원계획이 나오지 않아 구체적인 계획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일선 학교에서는 ‘인력이나 예산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보안을 강화한다는 게 가능하겠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전북도교육청의 한 관계자는 “경비실 설치 등에 필요한 경비만도 수십억 원에 달하며 현실적인 여건상 실효성도 의심스럽다”며 “교과부에서 구체적인 지원 방안이 나오기 전까지는 일단 관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효성에 대한 문제제기도 잇따르고 있다.
강원도교육청 최승룡 대변인은 “학교의 자율성, 안전성을 위해 필요한 조치이지만 학생과 교사·외부인 모두 출입증을 항시 달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대전 용전초등학교는 교육청으로부터 안전학교로 지정돼 지난해 출입증 착용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학교를 출입하는 모든 외부인을 통제하지는 못하고 있다.
학부모나 외부인이 학교 건물에 출입하고자 하면 학교를 순찰하는 ‘꿈나무지킴이’로부터 정문 앞에서 출입증을 발급받은 뒤 건물 1층 현관 앞에 설치된 전자보안시스템을 거쳐 교무실이나 행정실에서 출입일지까지 기록해야 한다.
꽤 꼼꼼한 출입통제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학교 건물이 아닌 운동장은 사정이 다르다.
꿈나무지킴이가 하루 10회 이상 순찰하며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지만 학교담장 허물기 사업으로 담장을 없앤 터라 수시로 드나드는 주민들을 모두 막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주민 변모(49·충북)씨는 “학교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함께 가꿔야 하는 시설인데 출입증을 패용한 사람에게만 출입을 허가하는 것은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면서 “담이 없는 학교는 어떻게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도 없다”고 꼬집었다.
충북도 내 담 없는 학교는 초등학교 57곳 등 모두 100곳으로, 도교육청은 담 없는 학교의 안전망을 강화하기 위해 일단 ‘배움터 지킴이’를 추가 배치하고 취약지역에 CCTV를 추가한다는 계획이다.
백승운 충북도교육청 장학사는 “현실적으로 담을 허문 학교에 다시 담을 쌓는 것은 어려워 건물 내 자동 개폐장치 설치를 지원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운동할 곳이 마땅치 않은 지역에서 학교 운동장이나 체육관을 이용해온 주민들의 불편도 우려된다.
동네 초교 체육관에서 매일 저녁 배드민턴을 한다는 주민 황모(51·제주)씨는 “학생들이 학교에 없는 새벽이나 저녁 시간에 학교 체육관과 운동장 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 좋았는데 통제되면 크게 아쉬울 것”이라며 “가끔 산책 삼아 학교 운동장을 걷는 동네 주민들도 출입증을 발급받아야 하나?”고 되물었다.
송모(46·전북 전주시)씨도 “평일 저녁때 아이들과 함께 인근 학교 운동장에서 놀이와 운동을 하곤 한다”며 “운동장에 갈 때마다 출입증을 발급받고 챙기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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