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기를 밥 먹듯 하며… 버스 5정거장 걸어다니며…
60여년 전 전쟁통에 남으로 내려온 이북 출신 할머니가 평생 고생하며 모은 100억원대 재산을 연세대에 기탁했다. “빈손으로 내려와 굶기를 밥 먹듯 하며 모은 것”이라면서 “돈이 없어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고 했다.연세대에 100억원 규모의 재산을 기부한 김순전(왼쪽)씨가 지난달 24일 서울 중곡동 자택으로 찾아온 정갑영 연세대 총장과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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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4일 김순전(89) 할머니가 모시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정갑영 연세대 총장실을 찾았다. 할머니는 자신이 소유한 전 재산을 연세대에 내놓겠다고 했다. 서울 중곡동 자택, 숭인동·능동·공릉동 소재 주택 및 상가 4채의 소유 지분과 예금 등 100억원에 이르는 큰 재산이었다. 연세대는 할머니가 홀로 살고 있는 중곡동 집을 제외한 모든 건물의 소유권 이전 절차를 지난달 말 마쳤다.
황해도 장연군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난 김 할머니는 6·25 전쟁 중 피란민에 섞여 남편, 오빠와 함께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다. 할머니가 들고 내려온 재산이라고는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낯선 서울에서 남편과 아들을 건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 할머니는 “버스비를 아끼려고 후암동에서 동대문까지 버스로 4~5 정거장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다녔다.”며 60여년 동안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하루하루 생활을 위해 노점상을 비롯해 손에 잡히는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다. 어렵게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부동산 등에 투자했고, 탁월한 안목 덕에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재산 규모가 어느덧 100억원까지 늘었다.
10여년 전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는 구순(九旬)을 앞두고 어린시절 공부 못 한 아쉬움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오빠들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며 공부를 이어갔지만 할머니는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다. 할머니가 대학교에 모든 재산을 내놓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연세대 방우영 이사장이 같은 이북 출신이라는 사실을 전해듣고 흔쾌히 연세대 기탁을 결정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식구들 먹고살 걱정은 없다.”면서 “저는 생각하지 마시고 그저 어려운 학생들 뽑아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교내에 자신의 뜻을 기리는 작은 비석 하나 만들어 달라는 뜻도 전했다.
정 총장은 지난달 24일 할머니의 중곡동 집을 찾아 감사패를 전달했다. 정 총장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크고 소중한 돈인지 알고 있다.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어르신의 뜻대로 잘 쓰겠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연세대 관계자는 “할머니를 세브란스병원으로 따로 초청해 건강상태를 점검하고 보청기를 선물했다.”면서 “할머니의 사후 장례를 주관하고 이름을 딴 ‘김순전 장학기금’을 운영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2012-09-0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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