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희망은 태권도였다.우연히 접하게 된 태권도로 새 인생을 얻었다고 소년은 말한다.경기 동두천에서 자란 그는 변변한 도복 하나 없이,미군부대에서 나온 밀가루 포대로 만든 도복을 입고 태권도를 할 정도로 가난한 형편에서 자랐다.
30여년이 흐른 지금,태권도 8단의 청년은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에서 대통령 경호실장 자리에 이르렀다.
알리 벤 봉고 온딤바 가봉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맡고있는 한국인 박상철씨 이야기다.
1984년 2월 9일.박씨가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에 첫발을 디딘 날이다.
해외개발공사에서 낸 가봉 정부 경호원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된 게 덜컥 합격 통보를 받았고,그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태어난 지 갓 두달 된 아이까지 떼어놓고 홀로 떠났다.
첫 직업으로 미군부대 내 태권도 강사를 하던 그는 막연히 외국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은 해봤지만,당시 태권사범들이 많이 진출해 기반을 닦은 미국도 아니고 생면부지의 땅 아프리카에서 사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 도착하고 나니 마음이 달라진다.친절하고 순수한 가봉 사람들의 인상이 그의 맘을 흔든 것이다.
처음으로 독자적인 경호를 맡은 이는 당시 오마르 봉고 대통령의 장남이자 현 대통령인 알리 봉고.박씨는 봉고 대통령의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경호를 맡기 시작해 그가 외무장관,국방장관 등 정부 요직을 거치는 지난 26년간 곁을 지켰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북한 경호원이 많았던 때라,그 역시 북한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했다.봉고 대통령의 외무장관 시절,함께 뉴욕 유엔본부를 방문했다가 미국의 모 일간지에 북한 사람으로 소개된 것이다.
박씨는 14일 “억울하고 황당했지만,북한이 아프리카에 많이 진출해있던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해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한다.
이에 박씨는 “가봉은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이자,변함없이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를 지지해 준 고마운 나라”라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대통령의 영향이 컸다.1975년 부친을 따라온 데 이어 대학시절 한국 기업의 초청으로 방한한 적 있는 봉고 대통령은 한국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박씨는 전한다.
박씨는 이제부터라도 한국이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한다.
가봉은 인구는 적지만 풍부한 원유와 천연자원을 갖고 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넘는 고소득 국가다.
박씨의 말에 의하면,오마르 봉고 전 대통령은 한국을 좋아해 4번이나 한국을 방문한 적 있고 1980년대에는 한 한국기업이 리브르빌 시내에 당시 최고층 현대식 백화점을 운영했기 때문에 한국에 친근함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이 가봉을 찾은 것은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이 유일하다.
가봉에서 활동하던 많은 한국 기업과 교민들이 발길을 돌리는 사이,중국이 막대한 자금을 앞세워 가봉에 진출해 큰 사업들을 수주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5년만 버텨보자’던 것이 벌써 25년이 지났다.중년이 된 지금도 태권도는 여전히 그의 삶이자 희망이다.가봉에 태권도를 더 널리 전파하는 일이 인생의 목표가 됐고,태권도는 한국과 가봉 사이의 끈끈한 연결고리가 됐다.
어린 시절 그의 사부가 그러했듯,박씨는 가봉의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태권도를 무료로 가르쳐주고 있다.
그는 또 가봉 내 학교에 태권도를 정규 체육과목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며,과거 국방부 근무 시절 이미 태권도 수련을 장병들의 의무로 지정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게다가 이제는 한국인 후배도 생겼다.한국 젊은이들이 가봉 대통령과 영부인의 경호원으로 채용돼 더욱 기쁘다.이제 남은 욕심이 있다면,재(在) 가봉 한인회장으로서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일 그리고 ‘박상철’ 이름을 딴 종합체육관을 짓는 일이다.
연합뉴스
30여년이 흐른 지금,태권도 8단의 청년은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에서 대통령 경호실장 자리에 이르렀다.
알리 벤 봉고 온딤바 가봉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맡고있는 한국인 박상철씨 이야기다.
1984년 2월 9일.박씨가 가봉의 수도 리브르빌에 첫발을 디딘 날이다.
해외개발공사에서 낸 가봉 정부 경호원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된 게 덜컥 합격 통보를 받았고,그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태어난 지 갓 두달 된 아이까지 떼어놓고 홀로 떠났다.
가봉 대통령의 ‘그림자’ 경호실장 박상철씨
알리 벤 봉고 온딤바 가봉 대통령과 26년간 그의 곁을 지킨 경호실장 한국인 박상철(왼쪽)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알리 벤 봉고 온딤바 가봉 대통령과 26년간 그의 곁을 지킨 경호실장 한국인 박상철(왼쪽)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그러나 막상 현지에 도착하고 나니 마음이 달라진다.친절하고 순수한 가봉 사람들의 인상이 그의 맘을 흔든 것이다.
처음으로 독자적인 경호를 맡은 이는 당시 오마르 봉고 대통령의 장남이자 현 대통령인 알리 봉고.박씨는 봉고 대통령의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경호를 맡기 시작해 그가 외무장관,국방장관 등 정부 요직을 거치는 지난 26년간 곁을 지켰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북한 경호원이 많았던 때라,그 역시 북한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했다.봉고 대통령의 외무장관 시절,함께 뉴욕 유엔본부를 방문했다가 미국의 모 일간지에 북한 사람으로 소개된 것이다.
박씨는 14일 “억울하고 황당했지만,북한이 아프리카에 많이 진출해있던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해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한다.
이에 박씨는 “가봉은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이자,변함없이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를 지지해 준 고마운 나라”라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대통령의 영향이 컸다.1975년 부친을 따라온 데 이어 대학시절 한국 기업의 초청으로 방한한 적 있는 봉고 대통령은 한국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박씨는 전한다.
박씨는 이제부터라도 한국이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한다.
가봉은 인구는 적지만 풍부한 원유와 천연자원을 갖고 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넘는 고소득 국가다.
박씨의 말에 의하면,오마르 봉고 전 대통령은 한국을 좋아해 4번이나 한국을 방문한 적 있고 1980년대에는 한 한국기업이 리브르빌 시내에 당시 최고층 현대식 백화점을 운영했기 때문에 한국에 친근함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이 가봉을 찾은 것은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이 유일하다.
가봉에서 활동하던 많은 한국 기업과 교민들이 발길을 돌리는 사이,중국이 막대한 자금을 앞세워 가봉에 진출해 큰 사업들을 수주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5년만 버텨보자’던 것이 벌써 25년이 지났다.중년이 된 지금도 태권도는 여전히 그의 삶이자 희망이다.가봉에 태권도를 더 널리 전파하는 일이 인생의 목표가 됐고,태권도는 한국과 가봉 사이의 끈끈한 연결고리가 됐다.
어린 시절 그의 사부가 그러했듯,박씨는 가봉의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태권도를 무료로 가르쳐주고 있다.
그는 또 가봉 내 학교에 태권도를 정규 체육과목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며,과거 국방부 근무 시절 이미 태권도 수련을 장병들의 의무로 지정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게다가 이제는 한국인 후배도 생겼다.한국 젊은이들이 가봉 대통령과 영부인의 경호원으로 채용돼 더욱 기쁘다.이제 남은 욕심이 있다면,재(在) 가봉 한인회장으로서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일 그리고 ‘박상철’ 이름을 딴 종합체육관을 짓는 일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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