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9단, 세 번째 공 던질까

정치 9단, 세 번째 공 던질까

안석 기자
입력 2022-01-13 20:44
수정 2022-01-14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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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O] ‘80대 구원투수’ 김종인 선택은

김종인(가운데) 전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대위원장이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당사를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정연호 기자
김종인(가운데) 전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대위원장이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당사를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정연호 기자
김종인(82) 전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은 평소 새벽 4~5시에 일어나 몸을 푸는 ‘루틴’을 갖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뇌를 푼다. 독서를 한다는 얘기다. 대부분 최근 출간된 신간을 읽는다고 한다. 독일 뮌스터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독일정론지 슈피겔의 서평을 참조해 책을 구입하거나 해외 지인들이 보내 주는 책을 받아 본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총기(聰氣)가 젊은이 못지않은 것은 이런 두뇌 훈련 덕분일까.

그런 그가 지난 3일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향해 “우리가 해준 대로 연기(演技)를 좀 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틀 뒤 김 전 위원장은 윤 후보로부터 전화로 결별 통보를 받았는데, 연기 발언이 결정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그 발언은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었다. 총기가 너무 활발해져서일까, 반대로 무뎌져서일까.

“현재 여의도에서 대선의 ‘판’을 짤 수 있는 사람은 딱 세 명뿐이다. 이해찬, 박지원, 그리고 김종인이다.” 김 전 위원장이 우여곡절 끝에 윤 후보 캠프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던 지난해 12월 초 수도권 지역구의 국민의힘 재선 의원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김 전 위원장이 윤 후보 캠프에서 방출되면서 졸지에 일자리를 잃었고, 판을 짤 기회도 놓친 상태다.

그런데 지난 12일 묘한 반전이 일어났다. 과거 민주당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박용진 민주당 의원이 김 전 위원장을 만나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어? 다시 민주당으로?’라는 놀라움과 함께 ‘안 될 건 또 뭐 있어?’라는 상상력이 버무러져 뇌를 바쁘게 한다. 그러고 보면 김 전 위원장은 계약기간이 풀린 ‘자유계약’(FA) 선수나 다름없다. 조건만 맞으면 마운드에서 공을 뿌릴 수만 있다면, FA 선수는 팀을 선택할 수 있지 않은가. ‘보수→진보→보수’로 소속팀을 옮기면서 구원승을 따냈던 그가 다시 ‘진보’로 간다 한들 어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가 자기 편이었을 때는 하나같이 그를 응원하지 않았나.

정작 중요한 건 김 전 위원장의 구위(球威)가 예전과 같으냐다. 부정적인 쪽은 주요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김 전 위원장을 유권자들이 더이상 신선하게 보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한다. 실제 그가 윤 후보 캠프에 합류했을 때 지지율 상승 효과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국민의힘 선대위 관계자는 “윤 후보는 김 전 위원장에게 과거 경제민주화 같은 굵직한 메시지가 나오기를 기대했는데,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며 “윤 후보가 준비한 메시지에 대해 김 전 위원장이 반대 의견을 내서 ‘그러면 대안을 달라’고 하니 마땅한 답도 나오지 않았다. 윤 후보로서는 답답했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옹호하는 쪽은 김 전 위원장의 잘못이 아니라 윤 후보가 애초에 그에게 ‘원톱’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 발휘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실제 윤 후보는 김 전 위원장과 함께 김병준·김한길씨를 동시에 영입하고 ‘윤핵관’(윤 후보 측 핵심 관계자)들에게도 권한을 부여하는 등 김 전 위원장에게 전권을 주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윤 후보와 이준석 대표 간 대립도 김 전 위원장의 운신의 폭을 좁혔다.

만약 윤 후보가 애초에 김 전 위원장에게 전권을 부여해 명실상부한 원톱 대접을 했다면 어땠을까. 한 여권 인사는 “내가 봤던 정치인 가운데 최고는 단연 김종인”이라며 “해야 할 일을 키워드로 바로바로 말해 주니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편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2016년 민주당은 김종인을 필두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는데, 국민의힘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김 위원장답지 않은 ‘연기 발언’ 실수는 어쩌면 원톱 아닌 원톱으로서의 불만이 누적돼 있다가 마침내 폭발한 것일 수도 있다.

김 전 위원장의 구위가 예전과 같을지, 예전만 못할지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도리는 당장 없다. 다만 이번 대선은 사상 유례없이 박빙으로 진행되고 있는 만큼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내 편을 만들어야 이길 수 있는 상황이다. 김 전 위원장의 행보를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박 의원은 김 전 위원장과 면담 후 “김 전 위원장이 이재명 (민주당) 후보에 대해서 아주 우호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민주당 승리 가능성에 대해서도 상당히 높게 봤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는데, 국민의힘으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발언이다.

김 전 위원장이 윤 후보 캠프에서 방출되지 않고 세 번째 구원승을 올렸다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거머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보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마운드에 설 날을 고대할 것 같다. ‘윤석열 팀’으로의 복귀든, ‘이재명 팀’으로의 이전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윤 후보 선대위 합류 여부를 놓고 여의도 전체가 시끌시끌했던 지난해 11월 중순 김 전 위원장은 정작 여유롭게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빈필하모닉 내한 공연을 즐겼다. 김 전 위원장의 심경이 지금도 그때처럼 느긋할지 궁금하다.
2022-01-14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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