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경력’ 유외교, 끝내 불명예 하차’

‘37년 경력’ 유외교, 끝내 불명예 하차’

입력 2010-09-04 00:00
수정 2010-09-0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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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특혜채용 파문으로 논란의 도마위에 올랐던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결국 낙마했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정책을 초기부터 진두지휘하며 숱한 고비를 넘겨온 ’최장수 장관‘중 한명이지만 예기치 못한 돌출악재에 따라 악화된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불명예 하차‘하게 됐다.

 유 장관의 지난 2년7개월은 위기와 시험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크고 작은 외교적 악재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잇따른 개인적 설화(舌禍)로 늘 정치적 논란의 도마에 올라있었다.

 취임 첫해부터 미국산 쇠고기 파동이라는 메가톤급 악재를 겪었고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성명 파동과 미국 국립지리원의 ’독도분쟁 지역화‘ 사태로 인해 야당으로부터 외교실정(失政) 공세에 시달렸다.

 이듬해인 2009년에는 ’말실수‘로 야당으로부터 사퇴압박에 직면하기도 했다.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 과정에서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민주당 천정배 의원을 향해 “여기 왜 들어왔어.미친 ×”라고 말해 논란을 빚은 것이다.

 지난 7월말에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ARF 직후 기자들과 오찬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친북 젊은이들은 북한에 가서 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또다시 정치적 논란에 불을 지폈다.당시 재.보선을 앞둔 야당은 유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는 맹렬한 공세를전개했다.

 이에 따라 유 장관은 고비때마다 교체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했으나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굳건히 자리를 지켜냈다.복잡한 외교적 현안들을 노련하게 대처해내는 경륜과 외교적 숙련도를 대통령으로부터 평가받았다는 관측이다.

 특히 북핵과 천안함 사건 등 민감한 외교적 난제를 맞아 현 정부의 외교노선을 일관성있게 견지하면서도 상황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해낸 점이 높은 점수를 얻었다는 후문이다.

 천안함 사건이후 불안정한 한반도 정세흐름 속에서 사상 첫 한.미 ’2+2‘(외교.국방장관) 회의를 통해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대외적으로 과시했고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의 성공개최를 지원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평가도 얻었다.

 외교가에서는 지난달 개각때 유 장관이 유임되자 ’3년 이상 재임‘이라는 기록을 세울 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기도 했다.1980년 9월 박동진 장관이 물러난 이후 30년간 3년 이상 재직한 외교장관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롱 런‘을 기대해온 유 장관이 이번에 중도하차한 것은 결국 이번 논란이 실제 내용여부를 떠나 국민정서상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측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15 경축사를 통해 국정기본방향으로 제시한 ’공정한 사회‘ 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비쳐진 점이 이 대통령과 여권에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고위관료의 특권적 직업 대물림‘이라는 비난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공정성 논란을 확산시킨 것이 치명타가 됐다는 분석이다.야당은 그간 누적된 불만을 표출해냈듯이 유 장관의 퇴진을 촉구하며 사퇴론을 키웠다.

 이에 따라 이 대통령으로서는 37년을 외교현장에서 뛰어온 유 장관의 경륜과 능력을 아까워하면서도 통치권 차원의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는게 외교소식통들의 분석이다.

 유 장관의 낙마에 따라 당장 목전으로 다가온 유엔 총회와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등의 주요일정과 외교현안 대응에 ’비상등‘이 켜지게 됐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유 장관이 후임 장관이 선임될 때까지 G20 준비 작업을 마무리하거나 최소한 힘을 보태는 ’마지막 봉사‘를 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실현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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