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백수1년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어… 죽어라 일한 젊은 날 억울”

[커버스토리] “백수1년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어… 죽어라 일한 젊은 날 억울”

입력 2012-10-27 00:00
수정 2012-10-27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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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박씨가 말하는 ‘허무한 내인생’

“도대체 난 그동안 뭘 한 걸까. 삶에 아무런 낙이 없다.” 박명식(54·가명)씨는 요즘 멍하게 앉아있는 일이 잦다. 무얼 해도, 누구와 있어도 도통 재미가 없다. 때로는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 때로는 콱 죽어버릴까 싶다. 가족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해본 게 언제인지, 부부관계를 한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생수와 떡을 넣은 단출한 배낭을 메고 산에 오를 때면 초라한 기분이 들어 참을 수가 없다. 살아온 세월에 대한 허무와 배신감, 살아갈 세월에 대한 공포와 암담함. 절망이란 게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2년 전 건설회사에서 퇴직한 뒤 야심 차게 치킨 전문점을 창업했지만 쫄딱 망해 퇴직금마저 날린 뒤 이런 증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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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청도 촌놈, 개천 출신 용을 꿈꾸다

박씨는 그 유명한 ‘58년 개띠’다. 6·25 전쟁 후 태어난 1955~63년생 ‘베이비붐’ 세대 중에서도 사람 수가 가장 많기로 유명한 1958년생이다. 그는 질곡의 현대사만큼이나 격동의 50년을 살았다.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2남 4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의 소원은 오직 쌀밥을 배불리 먹는 것이었다.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경북 청도 ‘촌놈’은 대구로 유학을 떠나 명문 국립대 기계공학부에 들어갔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지만 박씨에게 데모(시위)는 사치였다. 과외수업과 막노동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근면 성실하게 대학을 졸업했다.

●여름:유능한 사회인, 든든한 가장

일자리는 널려 있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큰 어려움 없이 서울에 있는 큰 건설회사에 들어갔다. 삼시 세끼를 직장에서 해결하며 밤낮 없이 일했다. 27세 되던 1985년 봄엔 중매로 만난 참한 아가씨와 결혼했다. 서울 단칸방에 살면서도 야근 후 나눠 먹는 붕어빵 하나에 부부는 깔깔댔다. 사글세를 내고 남은 월급은 대부분 시골 가족들의 생활비로 보내졌지만 일할 곳이 있고 쌀밥이 있기에 마냥 행복했다. 이듬 해 딸이 태어났고, 자식에겐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야근은 일상이었고 휴가는 남의 일이었다. 직장에 한 몸 바치는 게 당연한 줄만 알았다. 아들도 얻었다.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이사를 반복했다. ‘내집’만 있다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았다. 그는 마침내 1994년 경기도 성남 분당 신도시에 새로 지어진 31평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가을:52세 직장 퇴출, 좌절의 문턱

인생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젊고 똑똑한 부하 직원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직장에서 그의 입지는 차츰 쪼그라들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타고 빠르게 바뀌는 흐름과 유행을 좇아가기 버거웠다. 영어는 또 왜들 그렇게 잘하는지, 그는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추진력도 예전 같지 않았고 자신감도 확연히 떨어졌다. ‘꼰대’로 취급받는 걸 느끼며 박씨는 막연히 은퇴를 예감했다.

그래서일까. 2010년 쉰둘의 나이로 회사에서 잘렸을 때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실제로 큰 충격을 못 느꼈으니까. 딱 100일을 동분서주한 끝에 퇴직금 1억원으로 경기 용인 수지에 통닭집을 냈다.

그러나 창업은 쉬운 게 아니었다. 대접만 받아 왔던 그는 서비스업에서는 젬병이었다. 대우받고 살다가 갑자기 몸을 낮추려니 배알이 꼴렸다. 손님들을 살갑게 대하는 것도 어려웠고, 젊은 아르바이트생들을 다루기도 버거웠다. 계산과 서빙에 잔 실수도 많았다. 새벽까지 술 손님을 상대하느라 건강도 축났다. 신메뉴와 세련된 인테리어로 단장한 경쟁업체도 잇달아 들어섰다. 아내와도 자주 싸웠다. 결국 반 년도 안 돼 빈손으로 가게를 접었다. 정말 끝이었다. 50평생을 제대로 놀아 본 기억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렸는데 남은 건 달랑 50평짜리 아파트 하나였다. 박씨는 “팽팽하던 고무줄이 끊어진 느낌이었다.”고 했다.

●겨울:절망… 처자식보다 산이 더 좋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년간은 ‘백수’로 살았다. 직장이 없어지니까 특별히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었다. 격의 없이 술잔을 주고받던 사회 친구들과는 대부분 연락이 끊겼다. 아니, 박씨 스스로 끊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는 “괜한 자격지심 때문에 내가 먼저 피한 적이 많다.”고 했다. 동창 모임에도 몇 번 나가봤지만 아직 일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샘이 나서 움츠러들었고 같은 처지의 친구들은 궁상맞아서 싫었다.

아내와도 영 어색해졌다. 예능프로그램에서 삼시 세끼 끼니를 챙겨 줘야 하는 남편을 뜻하는 ‘삼식이’라는 말이 등장했을 땐 굴욕적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학생이 된 자식들과도 서먹해졌다. 할 말이 없고 어쩌다 대화를 해 보려 해도 관심사나 가치관이 달라 몇 마디 이어지질 않았다. 아내와는 여자친구 얘기며 학교 얘기며 일상을 속속들이 나누는데 아빠만 시쳇말로 ‘왕따’를 시키다니. ‘여태껏 누구 때문에 풍족하게 먹고 자고 입고 다녔는데’라고 생각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아이들과 소소한 일상 얘기를 해 본 기억이 없었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인간관계에 대한 서운함은 물론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사무치게 밀려든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되는데. 젊은 시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데’ 사춘기가 다시 오는 건가 싶었다. 사는 게 아무런 재미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가족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왠지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제대로 놀 줄도 몰랐다. 넘치는 시간이 고역이었다.

가장 우울한 건 통장 잔고가 팍팍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버는 건 없는데 씀씀이를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대학생 두 명을 키우다 보니 등록금만 매년 2000만원 가까이 들어갔다. 둘째가 군대에 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게다가 장남인 박씨는 고향 청도에 혼자 사시는 홀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마음의 짐까지 보태졌다. 이젠 ‘100세 시대’라는데 나의 노후만 대비해도 모자랄 판국에 뒷바라지해야 하는 자식과 부모 사이에 끼어 그저 답답할 뿐이다. 그래서 박씨는 오늘도 멍하니 앉아 울음을 삼킨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2012-10-2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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