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읽기] (103) 환향녀의 슬픔, 안추원과 안단의 비극

[병자호란 다시읽기] (103) 환향녀의 슬픔, 안추원과 안단의 비극

입력 2008-12-24 00:00
수정 2008-12-24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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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집안 환향 며느리들 대부분 버림받아 ‘두 번 눈물’

속환이나 도망을 통해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돌아온 여인들(還鄕女) 앞에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사족(士族) 부녀자들은 ‘오랑캐에게 실절(失節)한 여자’라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다.일부 신료들은 ‘속환되어온 며느리에게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는 없다.’며 이혼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출가했던 딸이 환향녀가 되어 돌아온 친정 부모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이혼을 섣불리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론도 있었지만,대부분의 사족 환향녀들은 본래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말았다.피로(被擄)로 말미암은 슬픔과 비극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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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의 정문 천하제일관.명나라 홍무 10년(1381년) 세워진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으로 예부터 한반도에서 만주 방면으로 나가는 육상교통로의 관문이었다.
산해관의 정문 천하제일관.명나라 홍무 10년(1381년) 세워진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으로 예부터 한반도에서 만주 방면으로 나가는 육상교통로의 관문이었다.


●환향녀의 이혼 문제를 둘러싼 논란

1638년(인조 16) 3월 조정에는 상반된 내용을 담은 두 개의 호소문이 올라왔다.억울한 사연을 인조에게 호소했던 주인공은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와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이었다.그들의 호소는 모두 환향녀의 이혼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장유는 자신의 외아들 장선징(張善徵)과 속환되어 돌아온 며느리가 이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실절한 며느리에게 선조의 제사를 계속 맡길 수 없으니 아들이 새 장가를 들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요지였다.한이겸의 사연은 장유의 호소 내용과는 정반대였다.그는 ‘자신의 딸이 속환되어 왔는데,사위가 딸을 버리고 새 장가를 들려고 하는 것이 원통하다.’며 인조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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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으로는 친황다오시에 속하는 오늘날 산해관의 성 내부 모습.
행정구역으로는 친황다오시에 속하는 오늘날 산해관의 성 내부 모습.


한 사람은 시아버지의 입장에서,다른 한 사람은 친정아버지의 입장에서 전혀 상반된 호소를 하고 있는 셈이다.입장이 난처해진 예조는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은 뒤 결정해야 한다고 물러섰다.

좌의정 최명길이 나섰다.그는 먼저 임진왜란 이후의 고사를 떠올렸다.‘제가 고로(故老)들에게 들었는데,왜란 뒤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당시 어떤 종실(宗室)이,송환된 아내와의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또 어떤 벼슬아치가 새장가를 든 뒤,본래의 아내가 쇄환(刷還)되자 선조께서는 후취(後娶)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시고 본처가 죽은 뒤에야 후취 여인을 비로소 정실부인으로 올렸다고 합니다.그밖에 재상이나 고관들 가운데 쇄환되어 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손을 낳아 명문 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예(禮)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니 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한 가지에 구애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명길은 단호했다.이혼을 허락하면 안 된다고 했다.이혼을 허락할 경우,수많은 부녀자들이 속환을 포기하고 이역에서 원귀(寃鬼)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조, 훈신(勳臣)의 독자 장선징에게만 특별히 이혼 허락

최명길은 또한 ‘속환을 통해 돌아온 부녀자들 모두가 실절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그는 끌려간 조선 여인들 가운데 청인의 회유와 협박에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또 청인들 중에도 그런 조선 여인들의 절조에 감명 받아 함부로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례를 들었다.최명길은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쓰고서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들어 환향녀들을 무조건 ‘실절한 여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고 했던 것이다.

‘인조실록’에는 장유와 한이겸의 상반된 호소 내용에 대해 최명길 이외의 다른 대신들이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하지만 최명길의 주장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그것은 ‘인조실록’의 사신(史臣)이 최명길의 주장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던 것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최명길을 비판했던 사평(史評)의 핵심은 이렇다.‘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포로가 된 부녀자들은,비록 본심은 아니었지만,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결국 절개를 잃은 것이다.그러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사평에 따르면 환향녀들이 포로가 되면서 죽지 않았던 것 자체가 이미 허물이 되고 죄가 되는 셈이다.

사평은 다시 최명길에게 화살을 돌린다.‘실절한 여자를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최명길은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이니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환향녀의 이혼 문제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최명길의 주장은 철저히 매도되었다.

장유 집안의 ‘이혼 문제’는 이후에도 다시 논란이 되었다.1640년(인조 18) 9월에는 장유의 아내가 예조에 다시 호소문을 올렸다.이번에는 호소문 속에 ‘며느리의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으니 이혼시켜 주기를 청한다.’는 내용이 있었다.당시 장유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번에도 대신들의 의견은 일단 신중했다.‘섣불리 이혼을 허락하면,부부 사이에 뜻이 맞지 않는 일이 있을 경우에도 너도나도 이혼하겠다고 나설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인조는 고육책을 내놓았다.‘이혼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장선징이 훈신(勳臣)의 독자임을 고려하여 특별히 그에게만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그 파장은 컸다.대부분의 사대부 집안들은,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며느리들을 내쳤고 새로운 며느리를 맞아들였다.사족 출신 환향녀들은 대부분 버림받고 말았다.사책(史冊)에도 이 여인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이 가엾은 희생자들의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끌려가던 안단 “나를 죽을 곳에 빠트린다” 울부짖어

환향녀들의 운명은 가혹했지만,포로들 가운데는 끝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속환해 줄 가족도 없고,가족은 있어도 경제적 능력이 없고,또 도망쳐 돌아올 여건도 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청에 그대로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속환의 가능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던 와중에도 귀향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다.현종대에 도망쳐 온 안추원(安秋元)과 숙종대에 도망쳐 온 안단(安端)의 사연이 주목된다.

개성 부근에 살다가 1637년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던 안추원은 심양으로 끌려갔다.1644년 청이 입관(入關)에 성공하자 안추원은 주인을 따라 북경으로 흘러들어 갔다.그는 1662년(현종 3) 탈출을 시도했다가 한 번 실패한 뒤 1664년 다시 시도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다.산해관을 통과하고 만주를 가로지르는 대모험이었다.

조선 조정은 28년 만에 탈출한 안추원을 고향인 개성으로 보냈다.하지만 개성에는 그를 품어줄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조정 또한 그에게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혈혈단신의 처지에 생계마저 막막해진 안추원은 결국 북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하지만 그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책문(柵門)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안단의 사연은 더 기막히다.병자호란 당시 포로가 되었던 그 또한 심양을 거쳐 북경으로 들어가 사역되었다.안단은 1674년(숙종 즉위년) 자신의 주인이 행방불명되자 조선으로 탈출을 시도했다.포로로 붙잡혀 끌려간 지 물경 37년 만이었다.안단은 산해관을 통과하여 봉황성(鳳凰城)을 거쳐 압록강의 중강(中江)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하지만 강을 건너게 해달라는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의주부윤은 그를 결박하여 봉황성으로 압송했다.청의 힐문을 의식한 조처였다.입국을 거부당하고 봉황성으로 끌려가던 안단은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나를 죽을 곳으로 빠뜨린다.”며 울부짖었다.

안추원과 안단의 사연은 처절하다.각각 28년,37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둘 모두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었지만,한 사람은 고국에서 결국 적응하지 못했고 다른 한 사람은 끝내 압록강을 건너지도 못했다.이들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전란의 비극에 휘말렸던 수많은 생령들의 처참한 고통을 생각하면서 오늘 이 전쟁을 다시 성찰해야 할 필연성을 새삼 절감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2008-12-24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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