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재즈로 몸매관리 초식男… 추리닝이 편한 건어물女

[2030] 재즈로 몸매관리 초식男… 추리닝이 편한 건어물女

입력 2009-07-22 00:00
수정 2009-07-22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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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싱글족들의 신인류 리포트

요즘 초식남과 건어물녀가 뜨고 있다. 초식남은 초식동물처럼 온순하고 혼자 있는 걸 즐기면서 연애와 결혼을 멀리하는 남성을 일컫는 말이다. 건어물녀는 직장에서는 능력있는 알파걸로 인정받지만 집에만 오면 무릎 나온 체육복을 입고 결혼에 대한 생각은 건어물처럼 말라버린 여성을 뜻한다. 당당한 초식남과 건어물녀로 살아가는 2030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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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강사 김모(31)씨는 초식남이라는 개념이 생소하지 않다. 나이 차이가 4~8살 나는 누나 3명 밑에서 막내아들로 자란 김씨는 어릴 때부터 ‘사내 자식이 계집애같이 군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중학교에서는 동성애자라는 놀림을 받고 심하게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군 입대 전에는 성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김씨도 자신의 여성적인 성향을 인정한다. 그는 고양이 캐릭터 ‘키티’를 좋아한다. 사무용품, 담요, 토스터 등 키티 상품을 수집하는 게 취미다. 재즈댄스로 몸매를 가꾼다. 7년째 같은 학원을 다니는데 10여명의 같은 반 학생 중에서 남자는 김씨뿐이다.

그는 “유연성을 키우고 균형 잡힌 몸매를 만드는 데 재즈댄스만큼 좋은 게 없어요.”라고 말했다. 조용한 성격 탓에 친구들과 만나 술 마시고 어울리는 것보다는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편을 더 좋아한다. 대학교 2학년 때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연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소개팅도 해보고 엄마 성화에 못 이겨 선 자리에도 두 번 나가봤는데 연애나 결혼할 필요성을 못 느껴요. 아직은 혼자 있어도 충분히 즐거운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4년차 직장인인 이모(29)씨가 요즘 가장 즐겨보는 드라마는 ‘결혼 못하는 남자’다. 누군가와 소통하는 데 서툴러 40살이 다 되도록 결혼을 못하는 남자 주인공 조재희(지진희 분)의 생활방식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여자친구와 제 생활을 모두 공유하고 감정을 교류하는 일이 귀찮아요. 그러다 헤어지면 누군가와 또 다시 시작해야 하잖아요.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쓰느니 저 혼자 취미생활 하면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효율적인 것 같아요.”라는 게 이씨의 지론이다.

그래서인지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는 여자친구를 사귄 적도 없다. 대학 때는 미팅, 소개팅 등으로 서너번 여자친구를 사귀기도 했지만 막상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할 나이가 되자 연애에 흥미를 잃게 됐다. 흔히 말하는 ‘결혼 적령기’가 됐지만 결혼 생각은 아직 없다. 부모님은 슬슬 선 얘기를 꺼내시지만 성격 맞춰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는 평범한 결혼생활은 딱 질색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희생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결혼을 의무처럼 여기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가정을 꾸리면서 사는 게 나름대로 보람은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 가족 구성원 각자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이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정이라고 하면 너무 전형적”이라면서 “남자는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하고 여자는 애 낳고 살림하다 보면 자기를 가꾸기 위해 쓸 시간이 하나도 없다. 아이는 아이대로 무서운 입시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며 자신없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대신 이씨가 몰두하는 취미는 블로그 꾸미기다. 이씨는 주말이면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난다. 200만원이 넘는 DSLR(디지털 일안 반사식 카메라) 카메라로 찍은 여행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는 게 삶의 낙이다. 그는 “언젠가는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할 날도 오겠지만 당분간은 저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어요.”라고 강조했다.

대학생 백모(24)씨는 생물학적 성은 남성임에도 학교의 여자 후배들 사이에서 ‘언니’로 통한다. 백씨는 알아주는 수다쟁이다. 여성들과 커피전문점에 앉아 2~3시간 지치지 않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을 정도다. 유행하는 옷차림, 남성들의 심리, 남성 아이돌 등 여성들이 좋아하는 주제에 능통한 덕분이다. 특히 패션에 관심이 많은 백씨는 여자 후배들이 옷을 사러 갈 때면 함께 가준다. 백화점 쇼핑을 귀찮아하는 여느 남성들과 다르다. 백씨는 여자 후배의 체형 콤플렉스를 커버할 수 있는 옷을 골라 입어보게 한 뒤 냉정한 평가를 해주기 때문에 ‘쇼핑 메이트’로 후배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본인을 가꾸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 한 달에 한 번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을 때 남성 패션잡지 2권을 정독하며 스타일을 연구한다. 온스타일 등 케이블 TV 패션채널도 눈여겨 본다. 백씨는 이런 소질을 살려 내년 봄 휴학을 하고 인터넷 의류쇼핑몰을 열 계획이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은 백씨지만 정작 여자친구를 사귀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일단 사업에 성공해 돈을 많이 번 뒤에 멋진 연애를 하겠다는 게 이씨의 계획이다. 그는 “초식남 열풍을 보면서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흥밋거리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생활방식으로 인정해줬으면 좋겠어요.”라는 바람을 전했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김모(27·여)씨는 금요일이면 언제나 ‘칼퇴근’을 한다. 동료들은 술 한잔 하자며 김씨를 붙잡지만 그는 단호하게 뿌리치고 집에 온다. 김씨가 항상 사들고 들어가는 것은 차가운 캔맥주와 주전부리. 집에 가서 곧바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침대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김씨가 일주일 가운데 가장 좋아하고 또 손꼽아 기다리는 순간이다.

김씨는 “맥주를 마시는 순간 일주일의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에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맥주를 마시며 일주일 동안 못 본 드라마를 챙겨본다. ‘미드(미국 드라마)’와 ‘일드(일본 드라마)’ 마니아인 김씨는 ‘건어물녀’라는 말의 기원이 된 일본 드라마 ‘호타루의 빛’도 이미 보았다. 그때 여자주인공과 자신이 너무 닮아 깜짝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김씨는 “여배우 아야세 하루카가 저보다 훨씬 예쁘다는 것만 빼고 모든 생활방식이 똑같았어요.”라고 말했다.

김씨는 주말에도 되도록 외출을 안 하는 편이다. 드라마를 보며 집에 있거나 집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정도다.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거나 소개팅, 미팅을 하지 않은 지 1년이 넘었다. 김씨가 건어물녀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사람 만나는 일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일주일 내내 신경을 박박 긁는 상사의 비위를 맞춰주고 ‘뒷담화’에 열중하는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인간관계가 얼마나 사람 진을 빠지게 하는지 깨닫게 되죠. 주말이라도 저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도저히 회사생활을 견뎌낼 수가 없어요.”라며 김씨는 고개를 저었다.

레스토랑 매니저인 한모(36·여)씨는 최근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건어물녀 테스트’를 해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나같이 구질구질한 질문뿐이건만 한씨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테스트 결과 한씨는 ‘초 건어물녀’라는 진단이 나왔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한씨는 일할 때 흐트러짐이 없다. 깨끗이 다린 유니폼을 입고 단정한 구두를 신고 머리카락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핀으로 고정시킨다. 한씨는 아침마다 직원들의 용모를 점검하고 서비스 교육을 시킨다. 직원들은 그를 ‘B사감’이라 부르며 깐깐한 상사로 여긴다.

그런 한씨도 집에 들어오면 ‘귀차니스트’가 된다. 화장을 지우지도 않은 채 침대에 몸을 던진다. 하루종일 서 있느라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케이블 TV에서 틀어주는 ‘무한도전’ ‘패밀리가 떴다’ 등의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10년 넘게 입어 목 부위가 늘어날 대로 늘어난 대학 동아리 티셔츠와 잠옷바지가 그가 걸치는 옷의 전부다. 배가 고파져 요리를 해 먹으려는 생각에 냉장고 앞에 섰다가도 파랗게 곰팡이가 핀 밑반찬을 보면 식욕이 뚝 떨어진다. 대충 사다 둔 크래커에 잼을 발라 끼니를 때운다. 그마저도 없으면 집앞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감자튀김 라지 사이즈를 포장해와 맥주 안주로 삼는다. 일주일에 한번 빨래를 하는 한씨는 마른 빨래를 갤 시간도 없고 필요성도 못 느낀다고 했다. ‘빨래 건조대는 옷걸이’라고 여길 정도다. 한씨는 심지어 제모도 하지 않는다. 레스토랑 유니폼 셔츠 소매가 팔꿈치 가까이 내려오고 검은색 긴 바지를 입기 때문에 노출할 일이 없다는 것.

한씨는 “저처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라면 건어물녀의 생활방식에 다들 맞장구를 칠 거예요. 손님들한테 시달리다가 아무도 없는 빈 집에 오면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쉬고만 싶거든요.”라며 동의를 구했다.

은행원 김모(27·여)씨는 지점을 찾는 고객들 사이에서 ‘최고 행원’으로 꼽힌다. 완벽한 외모에 상냥한 태도로 손님들을 대하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빨아서 다린 유니폼을 입고 환한 미소로 고객을 응대한다. 간혹 바빠 짙은 화장 대신 파우더만 얇게 하고 가는 날에는 차장이 조용히 불러 ‘고객을 상대하는 직업이니 외모에 좀 더 신경쓰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가끔 머리를 길게 길러 굵은 웨이브 퍼머를 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못마땅해할 상관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접는다.

회사에서는 완벽한 김씨지만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 건어물녀로 변신한다. 단정한 머리를 풀어 헤치고 화장을 지운 뒤 두꺼운 안경을 쓴다. 여름이면 김씨는 낡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는다. 해진 옷이 감촉이 좋다는 이유 때문이다. 물을 가득 담은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고 미리 준비해둔 최신 영화를 보면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러나 김씨는 간혹 남자친구가 늦은 밤 화상통화를 걸거나 집 앞에 불쑥 찾아오는 날이면 당혹스럽다고 전한다

김민희 오달란 유대근기자 dallan@seoul.co.kr
2009-07-22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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