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해준 선수들에게 고맙다. 우승하지 못해 국민들께 죄송하다.”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에서 일본에 아깝게 진 뒤 열린 인터뷰에서 김인식 감독은 공은 선수에게 돌리고 허물은 자신에게 씌웠다. ‘빅볼’도 ‘스몰볼’도 아닌 김인식표 ‘휴먼볼’로 중무장한 한국 선수단은 기량의 120%를 발휘하며 위대한 성취를 이뤘다. 국민 감독의 리더십에 홀린 것은 비단 선수들만이 아니었다. ‘선수들에 대한 무한신뢰’로 대표되는 김 감독의 용병술은 불황에 지쳐 있던 국민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야구에만 김인식 감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마술 같은 리더십으로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이 있다.
●‘다정다감’ 리더십
대학 시절 학내 방송국 생활을 했던 직장인 이모(30)씨는 모두 3명의 국장을 거쳤다. 한 명은 ‘폭군형’, 다른 한 명은 ‘권력과시형’, 나머지는 ‘소탈형’이었다. 폭군형 국장은 방송국 내에서 ‘공포정치’를 펼쳤다. 능력은 출중했지만, 지나치게 독선적이었다. 이씨는 “당시 방송 프로그램이나 진행은 학내에서 반응이 좋았지만 내부에서는 불만이 많았다.”고 말했다.
다음 국장은 ‘권력과시형’이었다. 겉으로는 후배들을 챙겨주는 것 같지만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툭하면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편하게 해줄게.”라고 말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왜 선배의 지시에 따르지 않느냐.”며 화내기 일쑤였다. 이씨와 친구들은 그에게 ‘선배병 환자’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씨가 꼽는 최상의 국장은 ‘소탈형’ 이었다. 그 선배는 국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존재감이 거의 없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막상 국장이 되자 후배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또 후배들의 말을 들으려고 할 뿐 자신의 입장은 내세우지 않았다. 이씨를 비롯한 방송국원들은 처음 겪어보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어색해했지만 이내 적응할 수 있었다. 신나게 일하다 보니 방송의 질도 덩달아 올라갔다. 이씨는 “선배는 늘 ‘너희 마음껏 해보라.’고 했다.”면서 “덕분에 놀듯 일하면서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었다.”고 자랑했다.
은행원 조모(29·여)씨는 입사 초 만났던 5년차 선배 홍모(37)씨를 ‘최고의 리더’로 꼽았다. 홍씨는 부하 직원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업무를 추진하는 ‘옆집 오빠형’ 상사였다. 30대 후반이었던 홍씨는 나이가 한참 어린 신입사원에게도 깍듯이 존댓말을 쓰며 예의를 지켰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언제나 부하 직원과 상의해 결론을 도출해내는 점이 직장상사로서 홍씨가 지닌 장점이었다. 상사가 일방적으로 업무처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아이디어를 내고 토의를 거쳐 결정하니 부하직원들도 책임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다. 조씨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라고 할까? 옆집 오빠같이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면이 존경스러웠다. 나도 그런 상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스킨십형’ 리더십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모(31·여)씨는 지난해 가을, 3박4일간 ‘무료 홍콩여행’을 다녀왔다. 김씨는 “모두 팀장님 덕분”이라고 말한다. 김씨의 회사에는 분기마다 최고 실적을 거둔 팀의 사원 한 명을 뽑아 해외여행권을 주는 인센티브제가 있다. 2007년부터 시행해온 제도지만 김씨에게 여행권은 ‘그림의 떡’이었다. 같은 사무실을 사용하는 라이벌팀에 번번이 1등자리를 내줬던 것. 김씨와 팀원들은 의욕을 잃은지 오래였다.
그러나 지난해 초 새 팀장이 부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입사 10년차 정모(37) 팀장은 첫회의에서 “Yes, We can(우리는 할 수 있다.)”을 외치며 팀원들을 독려했다. 의욕적으로 일을 처리해나가는 정 팀장의 추진력 덕에 팀 실적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갔지만 김씨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고객들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돌려 대출금 상황을 독촉하고 새 고객을 유치하는 것이 여간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늘어가는 팀 실력과는 달리 김씨의 실적은 여전히 하위권을 맴돌았다.
눈치 빠른 정 팀장은 점심시간에 김씨를 회사 근처 식당으로 불러내 근사한 오찬을 대접했다. 식사가 끝날 때쯤 팀장이 꺼낸 한마디에 김씨의 눈이 번쩍했다. 팀장은 “김 대리, 고생이 많아. 조금만 더 열심히 하자고. 첫 해외여행 티켓은 김 대리한테 밀어줄게.”라고 격려했다. 김씨는 긴가민가했지만, 팀원들에게 누가 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결국 김씨의 팀은 2·4분기에 만년 1등 팀을 10여점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정 팀장은 약속대로 김씨에게 여행권을 안겼다. 김씨는 “알고보니 모든 팀원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독려를 했더라고요. 이런 팀장 밑이라면 일할 맛이 나지 않겠어요?”라며 활짝 웃었다.
공기업 7년차인 정모(32)씨에겐 구세주 같은 직장 선배가 있다. 대학 때부터 소심하기로 소문난 그에게 상사들의 분위기를 잘 맞춰줘야 대접받는 회사 분위기는 적응불가의 난코스나 다름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가 센 동기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게 된 정씨는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었다. 영악한 동기 한모(31·여)씨는 그에게 온갖 잡무를 떠맡기며 자신은 부·차장들 눈에 띌 중요한 업무만 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하루하루 가시방석 같은 날을 보내던 정씨에게 ‘특급 도우미’가 찾아왔다. 인사이동으로 옆 팀에서 근무하던 김모(38) 차장이 정씨의 직속 상사로 옮겨왔다. 사내에서 친화력 있기로 유명한 차장이었다. 단번에 정씨의 고충을 눈치챈 김 차장은 업무마다 일부러 보이지 않게 정씨를 띄워주는 전략을 썼다. “정 대리, 내가 바빠서 그런데 엑셀작업 좀 해주지?” “내가 맡긴 보고서 정리는 다 했나?”는 식이었다. 김 차장은 동기 한씨에게도 “한 대리가 도와주니까 우리 팀의 손발이 척척 맞네.”라며 적당히 배려해주는 센스까지 발휘했다. 정씨는 “본인도 승진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을텐데 후배들 관계까지 조율해주는 아량을 보면서 꼭 저런 선배를 닮고 싶다고 되뇌게 됐다.”고 고백했다.
소규모 홍보대행사 4년차인 이모(28·여)씨는 선배 양모(36·여)씨가 친언니보다도 더 미덥다. 어린 나이에 입사하자마자 ‘사수’(바로 위 선배)가 하늘 같은 8년차의 양씨였던 것.
업무처리는 확실하지만 바른 말 잘하는 성격으로 사내에 소문이 자자했던 양씨였기에 부담은 더했다. 부담은 곧 현실로 닥쳤다. 이씨가 광고주 쪽 불만을 제대로 소화 못해 말썽을 빚은 날, 양씨가 이씨를 복도로 불러내더니 “너 왜 가르친 대로 못하니?”라며 꾸짖었다. 이씨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문제로 눈물 쏙 빠지도록 혼이 나자 양씨가 원망스러워졌다. 그 이후로도 비슷한 일은 몇 차례 반복됐다. 이씨는 차츰 양씨를 소원하게 생각하게 됐다. 1년이 지나 이씨 밑으로도 후배가 들어왔고 그녀는 양씨를 대충 피해가며 일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터졌다. 이씨가 광고주 쪽 불만 접수를 제대로 못해 프로젝트를 통째로 날리게 될 처지가 된 것. 사장의 불호령이 떨어진 찰나, 선배 양씨가 그녀를 감싸고 나섰다. “사장님, 제가 옆에서 다 지켜봤는데 저 친구 할 만큼 했습니다. 나머지도 좀 지켜보시지요.” 천군만마 같은 지원으로 이씨는 급한 불은 일단 끄고 양씨를 따라 뒷수습에 나섰다. 결국 일감을 날리는 최악의 사태는 면하게 됐다. 이씨는 “ ‘후배가 절로 따르게 만드는 선배 모습이 이런 거구나.’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스스로 모범형’ 리더십
5년차 직장인인 정모(29)씨는 갓 입사해 모신 여자 상사 한 분을 잊지 못한다. 주인공은 40대인 김모 국장. 회사 내에 5명밖에 없었던 여성 상사였던 그녀는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카리스마형’ 리더였다. 김 국장은 직장인들이 근무시간에 지루할 때 하는 웹 서핑이나 주식 거래에 한눈을 파는 경우가 없었다. 점심시간에도 남들보다 10분 빨리 들어와 업무를 시작하는 등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철두철미한 유형이었다. 정씨는 “회사에서 중간 간부인 국장급쯤 되면 법인카드를 마음대로 쓰기도 하는데 김 국장님은 업무 외에는 절대 카드 사용을 안 했다.”고 회상했다. 게다가 김 국장은 후배들에게 자신을 닮으라고 강요하는 법도 없었다. 정씨는 “우리가 잘못하면 곧바로 책임을 추궁하거나 질책하는 게 아니라 어떤 해결책이 있는지 제시하고 도와주는 타입이었다.”고 자랑했다.
대학생 강모(28)씨는 리더십 이야기가 나올 때면 군대에서 만난 하사관을 먼저 떠올린다. 카투사 출신인 강씨는 이등병 시절 서툰 영어 때문에 고생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생소한 병영 업무를 영어로 설명듣고 하자니 여간 골치 아팠던 게 아니었던 터. 그때 이씨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미군 중사 D(29)씨였다. D중사는 업무처리가 빠르지 않은 정씨를 절대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먼저 시범을 보이고 강씨가 그대로 따라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강씨 입장에서도 말로만 설명듣는 것보다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D중사는 궂은 일일수록 더욱 솔선수범했다. 혹한 속 야산으로 행군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눈까지 내려 강씨가 짊어진 군장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체력이 약했던 강씨는 점점 눈앞이 아른거렸다. 쓰러지기 직전 누군가 강씨의 짐을 들어올렸다. D중사였다. 그는 자신의 군장을 멘 등 대신 앞쪽으로 정씨의 군장을 들어멨다. 100kg이 넘는 거구였지만 무거울 법했다. 그러나 한마디 말 없이 조용히 수십㎞를 걸었다. 강씨는 “중사가 스스로 모범을 보이니 마음이 움직였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말했다.
유대근 박성국 오달란기자 dynamic@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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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31 1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