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 조선현은 지금의 허베이성 노룡현에 있었다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의 허베이성 노룡현에 있었다

입력 2015-12-17 16:10
수정 2015-12-1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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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리토성 출토유물이 ‘낙랑군 평양설’ 지지증거다” 정인성 교수 반박

중국의 한무제가 위만조선 지역에 설치한 한사군(郡)과 이 중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를 가늠할 수 있는 고대사의 큰 쟁점이다. 주류학계는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이른바 ‘한반도설’을 주장하는 반면, 비주류학계는 ‘요서설’을 지지하고 있다.

수십년간 이어져 온 역사학계의 이견이 17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서울 서대문구 그랜드힐튼 서울 컨벤션홀에서 열린 ‘한국상고사의 쟁점’ 학술회의에서 또다시 맞부딪혔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위만조선이 수도 자리에 세웠던 요동군 험독현과 기자조선의 수도 자리에 세웠던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평양 일대에서 찾는 것은 일체의 근거가 없는 일제의 정치선전”이라고 주류학계의 주장을 부정했다. 중국 고대 자료를 보면 위만조선의 왕험성(왕검성)은 평양이나 대동강 남쪽에 있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으며 현재 중국에서조차 험독현의 위치를 랴오닝성 서부에 있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는 ‘한반도설’을 “조선총독부 사관에 대한 극단적인 추종 자세”라고 비판하면서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의 허베이(河北)성 노룡현에 있었고, 요동군 험독현도 그 부근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반면, 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북한 평양시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가르지르며 축조된 ‘토성리토성’ 출토유물을 토대로 볼 때 ‘낙랑군 평양설’(한반도설)을 지지할 근거가 있다고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정 교수는 “삼국지 위서동이전 등의 기록에는 일관되게 군현을 통해 중국 세계와 접촉한 것으로 정리됐고 그 결과 한, 왜 공간에 각종 위세품(威勢品·상층계급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품)이 전해졌다”며 “해방 이후 발굴에서 확보된 반입토기 대부분이 평양지역에서 제작된 사실은 낙랑군 평양설을 강하게 지지하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고 위만조선을 포함한 고조선의 범위와 (고조선의 도읍지인) 왕검성의 위치가 평양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면서도 “평양지역에서 얻은 고고학적 성과를 낙랑군과 무관하다고 부정한다면 요동지역의 고구려 유적 역시 부정당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단군신화’가 일본인들이 단군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한 식민사학의 용어라는 주장은 잘못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단군 역시 역사학계의 오랜 논쟁거리로, 1974년 발행된 교과서에서 단군왕검을 신화적 인물로 해석한 주류학계의 주장이 교과서에 반영되자 재야학계를 중심으로 거센 개정 요구가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재야학계는 신화는 ‘허구적 이야기’로, 단군신화는 일본인들이 단군을 부정하고 고조선을 말살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이런 용어를 주류학계가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식민사학의 잔재라고 비판했다. 서영대 인하대 교수는 그러나 “신화는 민족 정체성의 근거이며 단군신화라는 용어는 한국학자들이 사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막상 일본인이 언제부터 단군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 물어보면 명확한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며 “일본은 1890년대부터 단군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신화보다는 ‘전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단군신화는 한국학자들이 사용한 용어이며 당시 신화는 ‘신성한 이야기’라는 의미에서 단군을 신성시한 것이자 민족 정체성의 근거로 쓰였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신채호 선생이 1908년 쓴 논설 ‘독사신론’이나 역사학자 이능화의 ‘조선사편수회 2차 위원회 발언’(1923), 시인 최남선의 ‘단군론’(1926)·‘불함문화론’(1928) 등에 단군신화라는 용어가 나온다. 서 교수는 “단군이 신화인가, 역사인가를 둘러싼 소모적 논쟁을 중단하고 단군신화를 통해 어떻게 역사를 재구성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올바르게 대처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공석구 한밭대 교수는 중국의 연·진 왕조의 장성(長城)이 한반도 중북부 지역까지 연결됐다는 중국학계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1954년 마오쩌둥(毛澤東) 당시 국가 주석의 지시에 의해 편찬된 ‘중국역사지도집’을 보면 연나라 장성은 압록강을 건너와 한반도 지역으로 이어지면서 청천강 부근까지, 진나라 장성은 압록강, 청천강을 건너 평양 서쪽지역까지 연결된다. 중국은 이를 토대로 고대 한반도 북부가 자국의 관할 아래 있었다고 주장한다.

공 교수는 그러나 “지도집에 제시된 연 장성은 고고학적으로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고, 진 장성 또한 그 실체를 입증하지 못한 추정선”이라면서 “지금까지 해당 지역 안에서 장성 유적이 존재한다는 자료나 유적 조사 보고서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반격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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