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1978년 연세대학교 운동장. 아침과 밤이슬이 내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그가 등장했다. 시멘트 벽에 200개씩 왼발킥을 찼다.1년 전만 해도 경성고등학교에서 오른발 하나로 고교대회 득점상까지 탔던 그였지만 내로라하는 선수들만 모인 연세대에서 그가 꿰찰 자리는 왼쪽 풀백뿐이었다. 남에게 지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그는 수첩에 또박또박 적어둔 ‘선후다(先後多)’란 좌우명처럼 ‘남보다 5분 일찍 5분 뒤까지 5분 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어느새 왼발의 달인이 된 그는 대학 4년 동안 한 번도 주전 자리에서 밀리지 않았다.
##장면2 1989년 몸 하나만 믿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일본 아마추어 축구팀인 PJM재팬에서 그를 스카우트한 것. 한 마디도 모르는 일본어가 문제였다. 손에 든 건 달랑 사전 하나뿐. 새벽시간 투자가 다시 시작됐다. 단어 크게 읽기부터 TV 뉴스 보며 발음 익히기 등으로 노력한 끝에 여섯달도 채 되지 않아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팀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일본의 FA컵 격인 일왕배 16강까지 팀을 끌어올렸다.
25살 때 문득 깎기가 귀찮아져 덥수룩하게 내버려둔 턱수염이 이젠 트레이드마크가 돼버린 그는 올 프로축구에 ‘잡초군단’ 돌풍을 이끌며 ‘우승 같은 준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은 인천의 지략가 장외룡(46) 감독이다.
●한국인 최초의 J-리그 감독이 되기까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공을 찼다. 또래보다 한뼘 작은 키가 발목을 잡았지만 경성중 감독이 기술이 좋고 기초가 잘 잡혔다며 선뜻 받아줬다. 대학 때부터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불운의 연속이었다. 정해원, 이태호 등과 뛰던 1978아시아청소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 시작이자 끝.82년 스페인월드컵 예선이었던 아시아선수권 결승에서 홈팀 쿠웨이트에 석패, 월드컵 문턱에서 눈물을 흩뿌렸고 같은 해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선 해방 뒤 처음으로 일본에 져 선수식당에서 밥도 못 얻어먹으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84년 무릎인대를 다쳐 2년 뒤 멕시코월드컵 본선도 TV로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프로에선 빛을 발했다.82년 대우에 입단, 이듬해 곧바로 슈퍼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3년 연속 베스트11에 뽑히기도 했다.87년 다시 한번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춘 뒤 미련없이 유니폼을 벗었다.
일본을 택한 건 지도자의 꿈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때를 잘 맞춰 J-리그의 태동기 때부터 현장에서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유소년과 지도자 육성 프로그램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 어느덧 동네축구팀까지 수만 개의 팀을 갖춘 일본 축구의 성장을 누군가는 공부해야 할 것 같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1999년 일본어 시험으로 일본 최고지도자 자격증(S급)을 따낸 유일한 외국인 감독이 됐다. 2000년부터 베르디 가와사키와 콘사도레 삿포로 등 J-리그 최초의 한국인 사령탑으로 활약했다.
●대표선수없는팀 확실한 색깔 만들어
시민구단을 창단한 안종복 단장의 간곡한 부름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예상은 했지만 상황은 정말 열악했다. 프로 팀 가운데 유일하게 전용 연습장이 없었다. 경기 파주와 가평 연습장으로 2∼3시간씩 오가며 운동하는 바람에 선수들은 피로를 풀 수 있는 시간도 못 가졌다. 감독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인천의 경기와 다음 상대의 경기, 다음 상대와의 이전 경기를 10분짜리 비디오 테이프로 핵심만 추려내 선수들에게 보여줬다. 국가대표 하나 없이 패배의식에만 젖었던 선수들은 장 감독의 확실한 목표설정 앞에 자신감 가득찬 눈빛으로 변해갔다.
장 감독은 “준우승이 결정된 순간 쉼없이 달려온 지난 1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슴이 아렸다.”고 말했다.
잠시 쉴 뿐, 그는 다시 내년을 준비한다. 또다른 한 가지 꿈도 오롯이 그의 심장에 박혀 있다. 선수로서 서보지 못한 월드컵 무대에 감독으로 서보는 것이 그의 마지막 목표다. 장 감독은 “죽어서도 그라운드에 뼛가루를 뿌려달라고 가족들에게 말했다.”며 의연한 표정을 짓는다. 악수하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거인처럼 느껴진다.
글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장외룡 감독은
▲생년월일 1959년 4월5일 전남 고흥 출생
▲체격 178㎝ 70㎏
▲출신학교 서울 불광초-경성중-경성고-연세대
▲취미 없음. 오로지 축구.
▲가족 부인 황명숙(46)씨와 딸 진아(21), 아들 동훈(17)
▲주요경력 1979∼84 국가대표,1982∼87 프로축구 대우 선수(84슈퍼리그 우승, 베스트11 3차례 수상),1989∼96 일본 아마추어팀 PJM재팬 플레잉코치 및 감독,1997∼1999 대우 수석코치 및 감독대행,1999 일본축구협회 공인 S급 지도자 자격 취득,2000 J-리그 베르디 가와사키 감독,2001∼03 J-리그 콘사도레 삿포로 감독,2005 인천 감독 취임
장외룡 감독
##장면2 1989년 몸 하나만 믿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일본 아마추어 축구팀인 PJM재팬에서 그를 스카우트한 것. 한 마디도 모르는 일본어가 문제였다. 손에 든 건 달랑 사전 하나뿐. 새벽시간 투자가 다시 시작됐다. 단어 크게 읽기부터 TV 뉴스 보며 발음 익히기 등으로 노력한 끝에 여섯달도 채 되지 않아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팀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일본의 FA컵 격인 일왕배 16강까지 팀을 끌어올렸다.
25살 때 문득 깎기가 귀찮아져 덥수룩하게 내버려둔 턱수염이 이젠 트레이드마크가 돼버린 그는 올 프로축구에 ‘잡초군단’ 돌풍을 이끌며 ‘우승 같은 준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은 인천의 지략가 장외룡(46) 감독이다.
●한국인 최초의 J-리그 감독이 되기까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공을 찼다. 또래보다 한뼘 작은 키가 발목을 잡았지만 경성중 감독이 기술이 좋고 기초가 잘 잡혔다며 선뜻 받아줬다. 대학 때부터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불운의 연속이었다. 정해원, 이태호 등과 뛰던 1978아시아청소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 시작이자 끝.82년 스페인월드컵 예선이었던 아시아선수권 결승에서 홈팀 쿠웨이트에 석패, 월드컵 문턱에서 눈물을 흩뿌렸고 같은 해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선 해방 뒤 처음으로 일본에 져 선수식당에서 밥도 못 얻어먹으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84년 무릎인대를 다쳐 2년 뒤 멕시코월드컵 본선도 TV로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프로에선 빛을 발했다.82년 대우에 입단, 이듬해 곧바로 슈퍼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3년 연속 베스트11에 뽑히기도 했다.87년 다시 한번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춘 뒤 미련없이 유니폼을 벗었다.
일본을 택한 건 지도자의 꿈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때를 잘 맞춰 J-리그의 태동기 때부터 현장에서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유소년과 지도자 육성 프로그램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 어느덧 동네축구팀까지 수만 개의 팀을 갖춘 일본 축구의 성장을 누군가는 공부해야 할 것 같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1999년 일본어 시험으로 일본 최고지도자 자격증(S급)을 따낸 유일한 외국인 감독이 됐다. 2000년부터 베르디 가와사키와 콘사도레 삿포로 등 J-리그 최초의 한국인 사령탑으로 활약했다.
●대표선수없는팀 확실한 색깔 만들어
시민구단을 창단한 안종복 단장의 간곡한 부름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예상은 했지만 상황은 정말 열악했다. 프로 팀 가운데 유일하게 전용 연습장이 없었다. 경기 파주와 가평 연습장으로 2∼3시간씩 오가며 운동하는 바람에 선수들은 피로를 풀 수 있는 시간도 못 가졌다. 감독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인천의 경기와 다음 상대의 경기, 다음 상대와의 이전 경기를 10분짜리 비디오 테이프로 핵심만 추려내 선수들에게 보여줬다. 국가대표 하나 없이 패배의식에만 젖었던 선수들은 장 감독의 확실한 목표설정 앞에 자신감 가득찬 눈빛으로 변해갔다.
장 감독은 “준우승이 결정된 순간 쉼없이 달려온 지난 1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슴이 아렸다.”고 말했다.
잠시 쉴 뿐, 그는 다시 내년을 준비한다. 또다른 한 가지 꿈도 오롯이 그의 심장에 박혀 있다. 선수로서 서보지 못한 월드컵 무대에 감독으로 서보는 것이 그의 마지막 목표다. 장 감독은 “죽어서도 그라운드에 뼛가루를 뿌려달라고 가족들에게 말했다.”며 의연한 표정을 짓는다. 악수하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거인처럼 느껴진다.
글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장외룡 감독은
▲생년월일 1959년 4월5일 전남 고흥 출생
▲체격 178㎝ 70㎏
▲출신학교 서울 불광초-경성중-경성고-연세대
▲취미 없음. 오로지 축구.
▲가족 부인 황명숙(46)씨와 딸 진아(21), 아들 동훈(17)
▲주요경력 1979∼84 국가대표,1982∼87 프로축구 대우 선수(84슈퍼리그 우승, 베스트11 3차례 수상),1989∼96 일본 아마추어팀 PJM재팬 플레잉코치 및 감독,1997∼1999 대우 수석코치 및 감독대행,1999 일본축구협회 공인 S급 지도자 자격 취득,2000 J-리그 베르디 가와사키 감독,2001∼03 J-리그 콘사도레 삿포로 감독,2005 인천 감독 취임
2005-12-09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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