슴슴해야 맛있는 음식이지요

슴슴해야 맛있는 음식이지요

입력 2011-05-22 00:00
수정 2011-05-2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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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호가 내려다보이는 퇴촌 얼굴박물관(경기 광주시 남종면)에도 봄이 찾아왔다. 겨우내 땅 밑에서 추위를 견딘 쑥이 제일 먼저 기지개를 켰다. 뒤란의 두릅나무도 새순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얼굴박물관의 관장이자 원로 연극인인 김정옥 교수의 부인이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박물관을 찾는 고객들에게 손수 해설까지 해주신다는 조경자 할머니(71세)의 음식 솜씨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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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서 먹냐고요? 그저 제철에 나는 음식을 간단하게 먹고 살아요. 이것저것 넣어야 하는 복잡한 건 안 하게 되더라고요.” 만들기 어려운 음식은 나가서 먹고 집에서는 제철에 나는 재료로 정성껏 만든 음식을 올리라는 것이 할머니의 지론이다. “요즘은 쑥을 자주 먹어요. 쑥쑥 자란다고 해서 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예전에는 정말 좋은 약이었어요.” 보릿고개에 먹지 못해 누렇게 얼굴이 뜬 사람들이 쑥을 먹으면 부황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덧붙이셨다.

봄기운 물씬 풍기는 쑥으로 할머니는 특별한 쑥탕과 쑥전을 만들어주셨다. 쑥으로 만드는 국은, 된장을 푼 국물에 쑥을 넣는 ‘쑥국’과 다진 쇠고기와 잘게 썬 쑥을 섞어 완자를 빚어 넣는 ‘애탕(艾湯)’이 있다. 그중에서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애탕은 다른 애탕과는 좀 달랐다. 할머니의 요리법이 쑥을 더 많이 먹을 수 있고 봄의 향기를 더 진하게 맡을 수 있었다. “알고 보면 만들기 어려울 건 없지만, 이 애탕이야말로 정말 사치스러운 음식이에요. 좋은 쑥 구해야지, 다듬어야지, 육수 만들어야지, 완자 빚어야지. 쑥이나 달걀 같은 재료들도 많이 들어가지….”

싱싱하고 좋은 쑥을 구해도 여린 잎만을 써야 하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 하나하나 손으로 다듬어야 한단다. 할머니가 다듬고 남은 찌꺼기 쑥을 보여주셨는데, 애탕에 들어가는 쑥보다 들어가지 못하는 쑥이 더 많았다. 쑥도 쑥이지만, 육수를 내는 것도 보통 정성은 아니다. 쇠고기나 닭고기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나 이날은 쇠고기 사태를 넉넉하게 넣고 낸 진한 육수를 준비했다. 이렇게 쑥과 육수가 준비됐다고 끝은 아니다. 쇠고기를 곱게 다져서 소금 후추로 간하고 참기름 마늘을 넉넉하게 넣어 치대준다. “입에 넣었을 때 부드럽게 팍 퍼지게 하려면 한참을 치대야 해요.” 이렇게 정성껏 반죽한 쇠고기를 지름 1~1.5㎝ 정도로 작게 빚는다.

그다음부터가 할머니만의 독특한 방법인데, 쇠고기 완자의 거죽을 쑥으로 꼭꼭 눌러가며 감싸준다. 이렇게 하면 중심에 소고기가 있고, 겉은 쑥으로 둘러싸인 모양이 된다. 이 완자를 밀가루에 굴린 다음 달걀 물에 넣어 재료들이 풀어지지 않도록 한 다음, 끓는 육수에 넣어주면 완성이다.

한 그릇에 쑥 완자를 한두 개 넣어 먹는데, 우선 국물을 떠먹어 보니 쑥향이 은은하게 밴 것이 아주 고급스러운 맛이 났다. 그다음 정성껏 만든 쑥 완자를 먹어보았다. 쑥 안에 있는 쇠고기 완자가 입 안에서 부드럽게 풀어지면 쑥향과 잘 어우러졌다. 쑥을 풍덩풍덩 넣어 끓이는 쑥국보다 쑥향은 덜했지만, 향이 은은해서 더 부담감 없이 편안하게 먹을 수 있었다.

쑥탕과 더불어 쑥전도 자주 해 드신다고 해서 어깨너머로 쑥전 만드는 법을 배워보았다. 할머니는 야채와 부침가루, 물, 계란 등을 한데 반죽해서 굽는 것이 아니라, 굵게 다진 고추와 양파, 쑥을 넣고 부침가루를 살짝 넣는다. 이걸 할머니는 물기를 제거한다는 뜻으로 ‘거습(去濕)’이라고 표현하셨다. 할머니의 말씀대로 딱 재료의 수분을 없앨 정도로만 부침가루를 넣어 고루 묻힌 다음, 달걀 물에 적셔서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지져내셨다. 달걀 물에도 40여 년 내공을 쌓아온 할머니만의 비법이 숨어 있었다. 보통 전을 지질 때는 달걀만 풀어 사용하는데, 할머니의 달걀 물은 달걀과 물을 동량으로 넣고 잘 섞었다. “이렇게 섞어서 해보니까 전을 지진 다음 너무 딱딱하지 않고 재료 맛도 잘 살릴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정말 부침가루나 달걀 물은 지극히 보조적인 역할만 할 뿐, 할머니의 쑥전은 주재료인 쑥의 맛과 향을 제대로 살려내고 있었다.

조경자 할머니가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곳은 박물관 내에 있는 한옥 ‘관석헌(觀石軒)’이다. 사람 손이 가지 않으면 금방 퇴색하는 한옥의 특성상 늘 사람이 들고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간혹 한옥에 특별한 손님이 오시면 경루에 불을 때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 역시 할머니의 몫이다. “맛있는 음식은 간이 센 음식이 아니라 슴슴해서 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 음식”이라는 조경자 할머니. 음식도 사람을 닮아가는 것인가 보다. 곁에 있기만 해도 마음이 즐거워지는 할머니의 맑은 표정과 온화한 미소를 보면 말이다.

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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