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인요한 소장
지난해 연말부터 세차게 불어오는 북녘 뉴스(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일명 푸른 눈의 의사 인요한(John A. Linton.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의 칼럼은 지면 곳곳에서 우리의 마음을 따끔거리게 했다. 인술(仁術)을 펼치는 그가 대북정책에 날선 고언을 던진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서양인이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로 쏟아놓는 그 발언들이 궁금했다. 바쁜 걸음은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로 향하는 낯선 외국인들의 옷깃과도 부딪쳤다. 병원의 비좁은 통로를 따라서 걷다보니, 국적은 달라도 다같이 아프다는 생각이 새삼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순천에서 온돌방 교육을 받은 이가 한국말을 잘한다는 것도 새삼스러웠다.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그는 4대째 이어서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유진 벨 증조할아버지 시절부터 한국에서 의료 및 선교활동을 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아버지 휴 린튼은 전남 도서지역에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한 호남 선교의 아버지다.
그는 전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순천에서 보냈다. 대전외국어학교와 연세대학교를 다녔고, 우리의 현대사를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다. 특히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시민군과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볼티모어》 《타임스》 《뉴스위크》 등의 외신기자 회견을 통역하면서 우리의 민주화 과정을 지켜본 증인이다.
조금 전까지 환자를 돌보던 그의 목소리는 높았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몸집에서 흘러나오는 전라도 순천의 억양이 곧바로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나온 신문을 한 뭉텅이 내보였다. “그간 북한을 다녀온 게 스물여섯 번입니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자꾸 스물세 번이라고 하네요. 한번 잘못 알려졌는데. 계속 이렇게 나오네요.”
그가 최근 북한을 다녀온 것은 지난해 오월. 북한주민에게 줄 비닐을 가지고 갔다. 모종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지금까지 북한을 13년 동안 다녔는데. 이 모든 시간보다도 최근 다녀온 1년 반의 시간이 더 인상적이에요. 우리와 미국이 강경하자, 북한은 중국과 가까워져서 큰 변화를 일으킵니다. 평양에는 지금 치킨집과 햄버거 가게도 있어요. 도시 전체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해요. 게다가 북한은 지금 강성대국 건설의 해 100돌이라고 해서 들떠 있어요.”
그의 말에 따르면 중국의 중장비가 동원된 신의주 평양 간 고속도로는 곧 중국과 북한의 무역이 활발해질 것을 암시한다. 그의 말은 북한전문가처럼 조심스럽고 자세했다.
그가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것은 1997년 1월 21일. 어머니 로이스 린튼이 40년 동안 의료봉사와 사회사업의 공을 인정받아 삼성문화재단이 주는 호암상을 받은 이듬해다. 어머니는 상금으로 받은 5,000만 원으로 앰뷸런스를 하나 사서 북한에 기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북한으로 직접 지원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선교활동을 하는 둘째형 스티븐이 이사장으로 있는 유진 벨 재단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는 1990년대 초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 겸 고문으로 5년 동안 북한을 드나들며 김일성 주석을 세 차례나 만났으며, 의료지원을 위해 북한을 자주 드나들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미국에서 제일 좋은 앰뷸런스를 구입한 유진 벨 재단의 기증식은 만수대 앞 광장에서 이뤄졌다.
사실 앰뷸런스를 북한에 보내자고 한 린튼 여사의 사연은 안타깝다. 1984년 아버지 휴 린튼은 농촌 교회 건축에 쓸 자재를 실은 지프를 몰고 오다 마주 오는 음주차량과 부딪쳤다. 피 흘리는 아버지를 옮길 수 있었던 것은 택시뿐이었다. 더 큰 병원으로 옮길 수 있는 앰뷸런스만 있었어도 아버지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한다.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떠나간 남편을 린튼 여사는 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은 그가 최초의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조의금으로 모인 3,200만 원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역에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와 같이 응급처치를 못해서 죽는 사람이 없도록 앰뷸런스 개발에 힘을 쏟았다. 이 시간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다양한 앰뷸런스를 요모조모 살펴본 시간이었다.
그는 한국의 도로사정에 맞게 소형 화물차를 개조했다. 그 결과 1995년에서야 최초로 한국형 앰뷸런스가 만들어졌다. 이 차는 지금 전국에 5,000여 대가 보급되어 전국 각지의 소방서와 병원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만든 앰뷸런스가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고 생각하니 투박한 그의 말이 더 친근하게 들렸다.
그의 사랑과 실천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는 눈을 치켜뜨고서 반문했다. “혹시 대한민국 교계의 핵심적인 문제가 뭔지 알아요?”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밤새도록 울고불고 회계하고 감동했으면서도 아침에 일어나서는 옆사람에게 치약을 빌려주지 않아요. 이것이 한국 교계의 문제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가장 귀한 말은 <야고보서>에 있다고 했다. “실천이 안 따르는 믿음은 소용이 없어요(야고보서 2:14)” 그는 ‘요한 1서 3장 18절’의 구절을 암송했다. “말과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그는 북한에 가서 교회를 짓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순서가 잘못됐다고 했다. 교회를 짓기에 앞서서 무너진 신뢰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은 버러지보다 못한 이들로 생각한다고. 1938년에 목사들이 신사참배를 해서 이미 ‘빛과 소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먼 시간의 이야기들을 줄줄이 풀어놓았다.
그는 “발 없이 말이 십리를 간다”는 말을 인용했다. 중국교포라고 불러야 할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받은 설움이 그대로 북한으로도 흘러 들어간다고 했다. 물질적으로는 잘 살지만 부도덕한 우리의 삶이 북쪽으로 전달된다고 꼬집었다. 그는 무조건 북한 사회의 변화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갚아야 할 마음의 부채가 있는지 물었다.
“있지요. 우리의 조상은 1897년에 한국에 온 이후로 115년 동안 전라도 사람들에게 낯가림을 당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병원, 학교, 교회를 지을 수 있었죠. 또 저는 연세대학교에서 정원 외 입학생으로 받아줘서 학교엘 다닐 수 있었지요. 저를 의사로 만들어준 것은 한국이에요. 이것은 특혜예요. 저는 늘 이 점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조상님들에 비하면 저는 한국으로부터 받기만 한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살면서 그 누구한테 용서를 빌어본 적이 있는지 궁금했다. 종교와 봉사의 삶을 실천한 아버지로부터 영향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한때는 아버지한테 많이 혼났지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요. 결국 미안하다는 감정도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미안하다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남에게 해를 준 것을 느끼지 못해요.” 병원의 소장인 그도 뭐가 마음에 안 들 때는 간호사한테 언성을 높인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고 머쓱해했다.
그는 자신을 낮추는 일에도 익숙한 의사였다. “낮아지지 못해서 인간들이 놓치는 게 많아요. 저는 낮아지는 데는 자신 있습니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그렇죠. 김일성과 김정일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조금만 더 정부가 낮아져서 조문을 했으면 얻을 것이 만 가지였는데. 낮아지지 못했죠. 영어에 이런 말이 있지요. ‘넘어지기 전에는 자존심이 있다.’ 정말로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이 많아요.” 그는 남북관계 개선에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을 정말 아쉬워했다.
조상이 미국인이면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이의 삶의 철학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첫 번째로 겸손을 꼽았다. “겸손처럼 무서운 것이 없어요. 우리는 겸손의 힘을 알아야 해요. 또 하나는 전라도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인데. 그것은 순정(純情)입니다. 순수한 정과 의리가 있는 사람은 그 누구를 배반하지 않죠.”
손양원 목사를 존경한다는 그의 삶은 이미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북한 결핵 치료에 나선 지 오래되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북한을 자주 오가며 분단의 아픔을 많이 본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눈빛이 푸른 것은 그가 먼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순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글_ 이기인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