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선비의 기상 굽이굽이 지조의 역사

타오르는 선비의 기상 굽이굽이 지조의 역사

입력 2013-12-19 00:00
수정 2013-12-19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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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의 삼다도’ 경북 영주 순흥면

경북 영주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선비 고을이라 부른다. 목숨과 바꿔 의리와 지조를 지킨 역사에 빗댄 표현이다. 그 올곧은 기상과 만날 수 있는 곳이 영주 북쪽, 그러니까 소백산 자락에 기댄 순흥면 일대다. 오래전 풍기라 불렸던 땅. 더 오래전엔 순흥도호부가 있었다. 선비 고을 영주는 바로 그 시대부터 비롯됐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 옆에서 본 저물녘 풍경. 지는 해가 소백산의 크고 작은 줄기들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였다. 한 해를 보내는 의식을 치르기에 이만한 곳도 드물지 싶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 옆에서 본 저물녘 풍경. 지는 해가 소백산의 크고 작은 줄기들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였다. 한 해를 보내는 의식을 치르기에 이만한 곳도 드물지 싶다.
옛 풍기군은 ‘뭍의 삼다도(三多島)’라 불렸다. 제주와 닮아 바람과 돌, 그리고 여자가 많다는 뜻에서다. 소백산과 죽령을 타고 내려온 바람은 늘 세차게 소읍을 할퀴었고, 손바닥만 한 모래톱조차 없었던 남원천 바닥은 세월에 씻긴 둥근 돌로 가득했다.

여자가 많았던 건 ‘풍기 인견’(명주실로 짠 비단) 때문이다. 풍기는 해방 전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특히 명주(明紬)의 본고장이었던 평안도 사람이 주를 이뤘다. 이들은 남하할 때 가져온 ‘족답베틀기’로 인견을 짰다. 이게 ‘풍기 인견’의 시초가 됐다. 해방이 되면서 ‘풍기 인견’은 전국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인견 공장에 다니던 여공들의 숫자만 2000여명을 헤아렸다. 갓 1만 명 넘게 사는 소읍에서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여공들이 우르르 몰려다녔으니 여자 많다 소리 나오는 게 당연했다.

이제 풍기군은 없다. 영주시에 통합됐기 때문이다. 한때 영천과 충북 괴산 등까지 이르렀던 위세도 풍기읍으로 쪼그라들었고, 그 자리를 이제 순흥면 등이 대신하고 있다.

영주는 흔히 선비 고을이라 불린다. 이는 양반 고을과 다소 어감이 다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기상은 선비 정신과 닮았으되 권세가들이 모여 사는 양반 고을은 아니라는 거다. 이런 기질이 잘 살아 있는 곳이 순흥면이다.

순흥면의 으뜸 볼거리는 소수서원이다. 1543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한데 소수서원과 마주한 금성단, 압각수 등도 빼놓지 말고 돌아보는 게 좋겠다. 여기야말로 올곧은 선비 정신이 발현됐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금성단은 조선시대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사약을 받은 금성대군을 모신 제단, 압각수는 1100년 묵었다는 금성단 옆의 늙은 은행나무다. 금성단 앞 게시판이 전하는 내용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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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 모양으로 휘어지며 내성천과 어우러진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태극 모양으로 휘어지며 내성천과 어우러진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동생 금성대군을 순흥으로 ‘위리안치’시킨다.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다시 단종 복위에 나선다. 하지만 계획은 발각됐고, 세조는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린다. 이에 가담한 선비와 주민들도 무차별 참살했다. 1456년의 정축지변이다. 당시 순흥의 청다리 밑을 적신 피는 죽교천을 따라 10여리 떨어진 마을까지 흐른 뒤 사라졌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동촌1리 ‘피끝마을’이다. 이때 오백 살 넘은 은행나무도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1683년 단종이 복위됐고, 또 30년 뒤 금성대군 등 선비들도 복권됐다. 죽었던 은행나무도 이때 다시 살아나 잎을 틔웠다는 것.

순흥면사무소는 옛 순흥도호부 자리에 세워졌다. 면사무소 뒤뜰에 봉도각 등 옛 건물과 왕버들 등 수백 년 묵은 고목들로 장식된 정원이 여태 남아 있다. 대한민국 면사무소 가운데 이만한 정취의 뒤뜰 가진 곳을 찾기도 쉽지 않다. 예서 영주의 대표 명소 부석사가 지척이다. 최근 절집으로 드는 회랑을 새로 짓는 등 외형이 적잖이 달라졌다. 부석사는 저물녘 방문하는 게 좋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앞에서 맞는 해넘이 풍경이 더없이 그윽하다.

영주 문어 이야기도 이채롭다. 바다의 산물이 내륙 중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영주까지 가서 번듯한 명성을 얻게 된 이유가 뭘까. 음식 평론가들은 문어가 오래전부터 영주와 안동 등 경북 내륙지방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름부터 ‘글의 생선’(文魚)인 데다, 비상한 머리와 바위 속에 숨는 은둔적 성격이 선비를 닮았다는 거다. 또 문어의 먹물은 글 쓸 때 먹을 대신했다. 게다가 강력한 빨판은 과거에 제꺽 급제한다는 은유로도 통했다.

큼직한 ‘영주 문어’를 들고 있는 엄순희 할머니. 영동선 열차만 17년을 탄 번개시장 터줏대감이다.
큼직한 ‘영주 문어’를 들고 있는 엄순희 할머니. 영동선 열차만 17년을 탄 번개시장 터줏대감이다.
한데 현지 주민들의 이야기는 다소 다르다. ‘영주 문어’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게 비교적 근세라는 것이다. 이는 영동선 철도 개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삼박물관의 송준태 관장이 전한 이야기는 이렇다. 영주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경북 북부의 철도교통 요지였다. 씨줄 날줄로 촘촘하게 얽힌 중앙선, 경북선 등 덕에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과 사통팔달로 연결됐다. 현재 영동선으로 통합된 영암선이 1955년 개통되면서 철길은 묵호까지 확장됐다. 귀한 해산물로 여겨졌던 문어가 영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묵호, 삼척 등에서 초벌로 삶은 문어는 기차에 실려 영주로 집결됐고, 곧바로 전국 각지로 확산됐다. 지금도 영주역 앞엔 번개시장이 있다. 문어가 도착하자마자 번개처럼 빠르게 팔려 나갔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영주 문어는 곧 숙성 문어다. 삶은 문어란 얘기다. 문어는 삶은 뒤 하루 정도 물기를 빼내고 먹어야 맛있다고 한다. 묵호 등에서 찐 문어가 완행열차를 타고 영주에 도착할 때쯤이면 가장 맛있는 상태로 숙성됐다. 그 덕에 영주 문어가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비 고을 영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가 수도리 전통마을, 이른바 무섬마을이다. 내성천이 휘돌아 가며 만든 모래톱 위에 반듯하게 터를 잡은 옛 마을은 자체가 중요민속문화재(제278호)다. 40여 가구 가운데 100년 넘은 집이 열여섯 채에 이르고, 문화재 등으로 지정된 집도 아홉 채나 된다. 대부분의 고택엔 실제 주민이 산다. 그 가운데 일부는 고택 체험을 위한 숙소로 쓰이기도 한다.

마을과 내성천이 만나는 곳엔 태극 모양의 외나무다리가 놓였다. 마을 옆으로 수도교가 놓이기 전까지 외부와의 연결 통로 노릇을 했던 다리다. 요즘도 강 건너 밭일하러 가는 주민들이 가끔 이용하지만, 그보다는 주로 관광객들이 재미 삼아 오간다. 좁은 나무다리를 따라 맑은 물 위를 자박자박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 여행 수첩 (지역번호 054)

→가는 길 부석사, 금성단 등 영주 북쪽의 관광지들을 먼저 보겠다면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으로 나와야 한다. 이어 북영주 방면 931번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곧장 가면 된다. 무섬마을은 중앙고속도로 영주나들목이 낫다. 28번국도에 이어 5번국도 영주시청 방면으로 갈아탄 뒤 적서교차로에서 우회전해 수도리 전통마을 표지판을 보고 따라간다. 영주시청 관광산업과 639-6601, 6606. 무섬마을 관광안내소 636-4700.

→맛집 순흥 쪽에선 묵밥이 유명하다. 이웃한 봉화, 춘양 등에서 생산된 메밀로 묵을 만들어 낸다. 맛은 순하다. 도회지 묵밥처럼 미끌거리며 입에서 겉도는 듯한 식감도 덜하다. 순흥묵집(632-2028)이 알려졌다. 순흥사거리에서 소수서원 방향 주유소 옆에 있다. 묵밥 7000원. 주전부리는 기지떡이 좋겠다. 기지떡은 흔히 술떡이라 불리는 ‘증편’의 사투리다. 술로 반죽한 멥쌀가루를 찐 뒤 대추 등 고명을 얹었다. 순흥기지떡(631-2929)이 이름났다. 한 상자에 6000원. 순흥사거리 초입에 있다.

문어는 맛볼 곳이 드물다. 대개 결혼식 등의 잔치나 제사에 쓸 용도로 팔기 때문이다. 영주역 번개시장 앞에 문어 파는 집이 세 곳 있다. 여기서 문어를 산 뒤 바로 옆 종로식당에서 맛볼 수 있다. 상차림 비용은 따로 받지 않지만, 별도 음식을 주문해야 한다. 1㎏에 4만~5만원. 4인 가족이 먹으려면 10만원 정도는 써야 한다.

→잘 곳 풍기 쪽에선 풍기관광호텔(637-8800), 소백산풍기온천리조트(604-1700) 등이 깨끗하다. 온천만 할 경우 8000원. 시내에선 영주호텔(634-1000)이 넓고 깔끔하다.

글 사진 영주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2013-12-1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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