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슬어 버린 인생 그래도… 빛난다

녹슬어 버린 인생 그래도… 빛난다

입력 2014-09-16 00:00
수정 2014-09-1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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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네 번째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펴낸 손택수 시인

“잘 살고 간다, 화장 뿌려, 안녕.”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 시인의 아버지는 달력 뒷장에 한 줄의 유언을 남겼다. 손택수(44) 시인은 이 한 줄로 시집을 묶었다고 말한다. ‘나무의 수사학’ 이후 4년 만에 낸 네 번째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창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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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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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는 탁월한 중매쟁이다. 그는 늘 무엇과 무엇 사이에 관절 튼튼한 접속사로 존재한다”는 함민복 시인의 평대로 시인은 애잔한 가족의 내력, 정신적으로 곤궁한 사회와 자기 내면, 어김없는 자연의 섭리 등에서 감각하고 사유한 깨달음을 세상에 내어놓는다.

지난 3월 실천문학사 대표직을 내려놓은 시인은 강원도 원주 토지문학관으로 들어갔다. ‘내 속 다 내어주고 비루하게 벌가벗긴/빈껍데기가 되어’(23쪽) 돌아간 그는 몇해간 끊고 지낸 ‘시(詩)살이’를 다시 시작했다. 이 기간에 지은 시들이 새 시집을 이뤘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집에서는 손택수 시의 ‘원형질’이라 할 만한 고향, 가족, 자연에서 수혈받은 정서와 상상력 외에도 ‘닿을 수 없는 꿈들을 옆에 둔 채’(17쪽) 아파하고 녹슬어 버린 자신에 대한 성찰이 유독 두드러진다.

‘아무래도 내 생은 좀 심심해진 것 같다/꿈을 업으로 삼게 된 자의 비애란 자신을 여행할 수 없다는 것/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녹스는 순간들을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을까’(녹슨 도끼의 시)

그러고는 ‘서식 밀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뜯어 먹는 올챙이’(물속의 히말라야)처럼 발버둥쳐야 살아남는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공연하고 쓸모없는 일들의 가치와 미덕을 우러른다.

‘내게도 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일정표에 정색을 하고 붉은색으로 표를 해놓은 일들 말고//가령,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모종대를 손보는 노파처럼/곧 헝클어지고 말 텃밭일망정/흙무더기를 뿌리 쪽으로 끌어다 다독거리는 일//(중략)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이 쓸모없는 일들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지는 것이다’(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돌아가신 아버지,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죽음에 대한 연작 시(‘죽음의 형식’ 1~5) 형태로 나타나는 동시에 묵은지, 지게, 꽃 등 일상의 사물과 자연에도 반복적으로 투영된다. ‘꽃이 피면 죽는 게 아니라/죽음까지가 꽃이다’(대꽃)는 인식에서나, 절명의 순간 동백나무 가지 꺾는 소리를 닮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러하다.

‘암투병 중인 수녀님이 선물로 동백가지를 끊는다/뚝, 아무런 망설임 없이/마치 오랜 동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단번에 가지 꺾이는 소리/세상 뜰 때 내 마지막 한마디도 저와 같았으면/비록 두려움에 떨다가도 어느 순간/지는 것도 보람인 양/가장 크고 부드러운 손아귀 속에서 뚝/꽃보다 진한 가지 향을 뿜어낼 수 있었으면’(이해인 수녀님의 동백가지 꺾는 소리)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2014-09-1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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