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 날리지 못해도 인생은 아름다워

‘한 방’ 날리지 못해도 인생은 아름다워

입력 2013-06-19 00:00
수정 2013-06-1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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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 작가 등단 11년만의 첫 소설집 ‘잽’

“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 거기가 싸움의 시작이야.(중략) 어때? 너는 끝없이 잽을 날리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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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 작가
김언수 작가


죽도록 패주고 싶은 놈이 있는 고교생 ‘나’는 권투를 배운다. 석달째 도장에 다녀도 주먹 뻗는 법조차 알려주지 않던 관장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은 주먹이 아니라 잽이라 일러준다. 하지만 ‘나’는 졸업할 때까지 잽 한 번 날리지 못하고 서른이 된다. 서른의 ‘나’는 말한다.

“매일매일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맞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주먹을 내밀지 않고 있는 고요한 세상이어서 도대체 어디다 잽을 날려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잽을 끊임없이 맞으면서도 제대로 한 방 날리지 못하는 하류인생들이 총집합했다. ‘캐비닛’, ‘설계자들’의 작가 김언수(41)가 등단 11년 만에 펴낸 첫 소설집 ‘잽’(문학동네 펴냄)에서다. 저마다의 이유로 비루한 ‘루저’들이 단편 9편으로 묶인 작품 속 주인공들이다.

작가는 나이 순으로 배열한 이들의 무표정한 일상을 비추며 현대인의 피로와 권태, 소외를 변주한다.

“삶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고 그래서 더 이상 불안할 것도 없는 뭐 그런 기분”(소파 이야기)에 침잠해 있는 인물들은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무기력하게 만들었나’는 물음표를 그리게 한다. 자기가 열고 들어온 금고에 갇힌 금고털이는 보석이며 골동품 같은 저 반짝이는 것들을 금고 밖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나 보석의 주인들이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금고 밖에 놔두면 불안하니까(금고에 갇히다). 결국 금고를 가진 자나 훔치는 자나 기대는 곳은 ‘환상’뿐이라는 씁쓸함이 맴돈다.

술집 아가씨, 삐끼와 건달이 모여사는 골목길 ‘단발장 스트리트’에 사는 단란주점 웨이터 ‘나’는 돈 봉투를 받고 살인사건에 거짓 증언을 한다. 그리곤 온갖 쓰레기를 몸에 담고 말없이 우울한 표정만 짓고 있는 쓰레기통을 바라본다(단발장 스트리트). 우울한 쓰레기통과 ‘나’는 닮은 꼴인 것만 같다.

2006년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첫 장편 ‘캐비닛’에서 별난 상상력을 보여줬던 김언수는 “이제 기발한 이야기보다 현실에 발톱을 박은 힘 있는 이야기가 좋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루저는 곧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다. 작가는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는 무승부 속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아름답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잽을 날리기엔 힘이 없고 그렇다고 굽신거리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서 다들 애매하게 살잖아요? 그렇게 버티는 무승부 안에서 자신만의 삶을 얻어내는 것, 가족을 위해 출근을 하고 사회에서 잽을 맞고 다니는 게 무기력한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2013-06-19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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