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 잃어가는 남자… 말 잃은 여자 고요한 언어 세상서 잠깐의 ‘쉼’을

시력 잃어가는 남자… 말 잃은 여자 고요한 언어 세상서 잠깐의 ‘쉼’을

입력 2011-11-12 00:00
수정 2011-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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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 낸 한강

고대 그리스어인 희랍어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사람은 어떤 이들일까. 한강(41)의 새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펴냄)에서는 “동기가 어떻든,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걸음걸이와 말의 속력이 대체로 느리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아마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일 테지요). 오래전에 죽은 말, 구어(口語)로 소통할 수 없는 말이라서일까요. 침묵과 수줍은 망설임, 덤덤하게 반응하는 웃음으로 강의실의 공기는 서서히 덥혀지고, 서서히 식어갑니다.”라고 희랍어 강사가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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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일이 나에게 허락되어 있다는 것, 글쓰기가 내 삶을 힘껏 밀고 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는 작가 한강. 문학동네 제공
“쓰는 일이 나에게 허락되어 있다는 것, 글쓰기가 내 삶을 힘껏 밀고 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는 작가 한강.
문학동네 제공


●전작들처럼 사회 부적응자 그려

‘희랍어 시간’의 주인공은 ‘나’와 ‘그녀’로 불리는 한 남자와 여자다. 남자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여자는 말을 잃었다. 남자는 희랍어를 가르치고, 여자는 남자에게서 희랍어를 배운다.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한강은 아버지 한승원과 부녀 소설가로도 유명하다. 가녀린 외모에 차분한 말투와 달리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등의 전작에서 날것의 현실과 그 현실 속에 제대로 발을 딛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희랍어 시간’의 주인공들도 사회 부적응자들이다. 주인공 남자는 열다섯 살에 가족과 함께 독일로 떠난다. 독일에서 보낸 17년 동안 남자는 ‘화엄경 강의’를 읽고 또 읽는다. 마흔 살이면 유전적 이유로 아버지처럼 시력을 잃게 될 남자는 아직 볼 수 있긴 하다.

너무 늦은 10대의 나이에 독일에 간 남자는 인생과 언어와 문화가 두 동강 나는 경험을 한다. 남자는 독일에서 희랍어에 재능을 발휘한다. 수천년 전에 죽은 언어라는 사실과 함께 그 복잡한 문법체계가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처럼 느껴졌다고 남자는 고백한다. 남자는 모국어를 쓰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유로 한국에 온다.

여자가 말을 잃은 이유는 분명치 않다. 소설에서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었다.”고 설명한다. 여자는 반년 전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수년 전에 이혼했고, 세 차례의 소송 끝에 결국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을 잃었다. 여자는 자명한 원인을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라고 필담으로 부인한다.

●6~8월 인터넷 카페에 일일 연재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좀 더 가까워지게 되는 계기는 남자가 계단에서 헛디뎌 안경이 깨지면서 찾아온다. 여자는 아이가 아플 때처럼 다친 남자를 돌본다. 남자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가면서.

지난 6~8월 인터넷 카페에 일 일 연재된 소설은 문장 하나하나가 시처럼 섬세하다. 실제로 소설의 여러 장은 시로 채워져 있다. 소설이 당선되기 전에 시가 먼저 인정받았던 작가의 이력이 드러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문자이자 말은 없고 글로만 남아 있는 희랍어,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말을 잃은 여자 등 소설의 주요 뼈대에는 사라져가는 것들이 표출하는 비장미가 어려 있다. 비장미는 언어 속에 담긴 언어를 찾아 글을 쓴 듯한 작가의 문장과 어우러져 더욱 빛을 발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이다. 누구나 때때로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듯한, 발이 없어 죽기 전에는 영원히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없는 ‘발 없는 새’와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소설 ‘희랍어 시간’은 발 없는 새에게 넘치거나 모자람 없는 감정과, 고르고 또 고른 절제된 언어로 희랍어 강의 시간과 같은 고요한 언어의 세상에서 잠깐의 ‘쉼’을 안겨준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2011-11-12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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